[2002한국미술현장진단]③기획전이 없는 한국 화랑가

  • 입력 2002년 9월 8일 17시 49분


서울 인사동의 화랑가. 국내 화랑가는 “볼 만한 기획전이 거의 없다”는 지적에 봉착해 있다.

서울 인사동의 화랑가. 국내 화랑가는 “볼 만한 기획전이 거의 없다”는 지적에 봉착해 있다.

“기획전에 몇 번 참가했으나 전시 경력에 넣고 싶지 않다. 주제는 거창했지만 실은 이 작가 저 작가 억지로 꿰맞춘 것이었고 별 의미도 없었다.” (한 조각가)

특정 주제나 방향을 정해 미술의 흐름을 보여주거나 새로운 이슈를 제기하기 위해 꾸며지는 미술 기획전이 속빈 강정이 된지 오래다.

2002년 한 해 국내에서 열린 국내 작가 전시는 모두 6300여건(서울 3200여건). 이 중 기획전은 5∼10%로 추산된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기획전이 증가하는 추세다. 큐레이터라는 직업이 각광을 받으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화랑들도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기획전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볼 만한 기획전이 드물다는 게 미술계의 중론. 불과 10여곳 이내의 국공립 사립 미술관과 갤러리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그저 그런’ 기획전이다.

유명 미술관의 기획전도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의미있는 기획전이 활성화 되어야만 한국 미술이 한단계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기획자의 의도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고 지적받았던 ‘2000 미디어시티 서울’

▽왜 기획전인가?〓기획전은 단순히 작품을 보여주는 차원이 아니다.

한 큐레이터는 “기획전을 준비하다보면 어떤 주제의 미술이 왜 필요한지, 이 시대의 문화나 일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미술사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기획전은 현재 한국 미술의 흐름과 이슈를 살펴보고 그 미래를 전망할 수 있게 해준다는 말이다.

윤난지 이화여대교수는 “기획자인 큐레이터가 전문성과 창조성을 발휘해 미술의 흐름을 하나의 주제나 시각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이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면 미술 문화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인기 작가의 개인전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한국 미술계에서 젊은 작가의 발굴을 위해 기획전은 반드시 필요하다.

갤러리미술관의 이명옥 관장은 “젊은 작가들이 자비로 전시를 열기 어려운 상황에서 기획전은 촉망받는 작가들을 발굴하는 좋은 기회”라고 말한다.

▽이름만 기획인 한국의 기획전〓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기획의 변(辯)은 거창하지만 내용은 허술하다. ‘한국 현대 미술의 회고와 전망’류의 기획전이 대표적인 예다. 이런 저런 작가 수십 수백명을 한 자리에 묶어 놓을 뿐이다.

기획전마다 그 작가가 그 작가라는 점도 문제다. 어떤 작가는 최근 한달 사이에 동일한 작품을 한 차례의 개인전과 두 차례의 기획전에 선보였다. 기획자와 가까운 작가들이 자주 등장하는 경우도 있고, A가 기획전에 참가하는데 비슷한 수준의 동년배 작가 B를 빼면 욕먹을 것 같아 B를 함께 참가시키는 경우도 있다. 기획전이 아니라 단체전일 뿐이다. 젊은 작가 발굴도 부실할 수밖에 없다.

▽기획 따로 작품 따로〓기획 테마가 작품과 연결되지 않는 기획전도 허다하다. 테마가 지나치게 관념적 현학적인 경우다. 실제 작품을 살펴보지 않고 기획자 혼자서 그럴듯한 테마를 정한 뒤 억지로 작품을 끼어 맞춘 것이다. 철학적인 제목의 기획전이 대개 “뭔지 모르겠다”는 지적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삼성미술관의 안소연 선임학예연구원은“작가는 없고 큐레이터만 남았다. 큐레이터는 전시의 테마와 작가의 예술성이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하는데 큐레이터의 의도가 너무 앞서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했다. 유재길 미술평론가도 “기획자가 작품의 주인처럼 군림한다. 관객은 지루하고 작품읽기가 힘들다”고 비판했다. (‘미술평단’ 2002 여름호).

▽기획자(큐레이터)의 전문성 부족〓부실 기획은 일차적으로 큐레이터의 전문성 부족에서 비롯한다. 그 작가가 그 작가인 것이나 기획 따로 작품 따로인 것 모두 미술 현장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획전을 준비하면서 참여 작가의 작품 실물을 보거나 작업 현장을 찾는 큐레이터는 드물다. 박영택 경기대교수는 “전문성 부족으로 깊이도 없고 이슈가 되지도 않는 테마를 과대포장하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 큐레이터는 “상업적 목적의 갤러리는 돈되는 작품을 전시해 판매 실적만 거두려 한다. 상대적으로 기획전엔 지원이 적고 시간도 부족해 한두달 안에 기획전을 준비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한국의 기획전을 위하여〓국내 갤러리 큐레이터의 여건이 열악하다는 점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그럼에도 큐레이터들이 좀 더 치열한 프로의식을 갖춰야 한다는 주문이 많다.

꽃이나 얼굴처럼 작품의 소재를 테마로 삼는 기획전도 좀더 사회 문화적 맥락과 연결시키는 기획전으로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영택 교수는 “큐레이터들이 한국 미술의 흐름이나 미술과 문화의 관계 등에 대해 깊히 고민하면서 작가들의 현장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하면서 “상업 갤러리들도 큐레이터에 대한 지원을 늘려 안목을 높이고 좀 더 공을 들인 기획전을 선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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