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신간]'화사'

  • 입력 2001년 1월 19일 18시 39분


눈 감고, 입 다물고, 뒤돌아선, 겨울도시의 무채색에 질려 있었던 탓일까, 아니면 십 수 년 만에 처음이라는 한파에 한바탕 혼쭐이 난 뒤라서 더 그랬을까?

‘화사’라는 붉고 뜨거운 표제가 우선 반가웠다. 이미 반쯤은 홀린 채로 책장을 펼쳤는데, 과연 거기엔 우리들 일상의 굳은 살을 아프도록 물어뜯어줄 요망한 ‘꽃 배암(花蛇)’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작품의 첫머리에서부터, 서정주 시인의 시 ‘화사’의 탈을 쓰고 새침하게 등장하는 이 꽃뱀은, 주인공 해란의 꿈 속에 나타나 그녀와 몸을 겹치고, 그녀를 ‘축축한 어둠과 피의 구멍’으로 이끌고 간다. 뱀에 들씌어, 뱀과 함께 음험한 구멍으로 둔갑하는 해란의 숨가쁜 성적 망상과 도발이 바로 이 작품의 기본 골격이다.

부유한 양돈업자의 외동딸이며 작가 지망생인, 아름다운 숫처녀 해란은 자신의 스승이자 시인인 유부남 기현을 짝사랑하면서도 양돈장의 일꾼 임종훈의 야릇한 매력에 몸살을 하고, 한편으로는 젊은 스님 묵산의 맑고 고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지 못해 안달을 한다. 자신의 처녀를 미련 없이 바칠 만한 대상을 찾아 헤매지만 그녀의 대담한 기도는 남자들의 이중성과 비겁한 균형감각에 부딪쳐 번번이 좌절되고 만다.

이 같은 성적인 망상과 도발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육체적으로 묘사된 자연풍광과 어우러져 야성적 에너지를 발산하는가 하면, 작중인물들 간에 난무하는 비속하고 엉큼한 언설에 얼룩져 배설의 쾌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한 성적 판타지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드는 예술적 진정성은 바로 해란이라는 존재의 안과 밖을 교직하고 있는 씨실과 날실의 갈등이다. 도덕률에 순종하며 살고 싶은 마음과 그것을 거부하고 싶은 원초적 몸짓, 자기 자신을 파괴해버리고 싶은 욕망과 거듭나고 싶은 욕망. 출생의 비밀에 대한 고통스러운 의심과 주어진 현실의 안락함을 지키려는 속물적 계산.

이처럼 양립되지 않는 양 극단 사이에서 갈등하는 해란에게 도피처가 되는 것은 오직 분열적인 망상과 도발 뿐이다. 필사적으로 망상하고자 하는 해란은 오직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이 눈멀고 귀먹은, 뜨거운 몸뚱이는 예술이나 종교의 가면을 쓰고 해란의 처녀성 주변을 배회하는 남자들에게 사로잡혀 몸살을 한다.

결국 해란의 망상과 도발은 첫만남에서부터 그녀의 운명에 주술을 걸었던 남자, ‘선무당’과의 성적 결합을 통해 막을 내린다. 처녀성이 소멸되는 순간 ‘시퍼런 하늘을 제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새’처럼 참자유를 획득하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결국 그녀의 길고 혼란스러웠던 방황은 분열적 자아의 소멸을 통해 충일한 존재로 거듭나려는 몸부림에 다름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이제는 ‘다산성 암퇘지의 자궁처럼 우주를 줄줄이 잉태했다가 무더기 무더기 낳아놓을 생각을’ 하며 깔깔거리고 웃는 해란을 보며, 문득 처음의 꽃뱀을 떠올리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내가 정말로 해란을 만나긴 만난 것일까?

그러고 보면 화사란 생명의 축복과 관능의 저주를 겹으로 타고난 우리들이, 눈 번히 뜨고 꾸는 망측한 꿈의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조민희(소설가·2000년 동아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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