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혼인보戰 1국]조선진 싱거운 불계승

  • 입력 2000년 5월 25일 00시 05분


‘아니, 세상에…. 이런 간단한 축을 착각하다니….’

24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55기 일본 혼인보(本因坊)전 도전기 1국.

조선진(趙善津·30)혼인보에게 도전한 대만출신의 왕밍완(王銘琬·39)9단이 얼굴을 붉힌 채 바둑판을 물끄러미 내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힘없이 돌을 내려놓았다.

59수의 단명국. 아마추어 유단자라도 한눈에 볼 수 있는 간단한 축을 착각한 왕9단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 제한시간 8시간짜리 이틀걸이 바둑에서 첫날 승부가 난 것은 혼인보전 사상 두번째. 이날 대국은 7시간여 만에 끝났다.

조 혼인보가 흑을 잡고 시작된 이날 바둑은 조 혼인보의 실리와 왕 9단의 세력이 대립하는 양상이었다. 조 혼인보가 초반 좌변에서 흑29의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바둑의 흐름이 왕 9단에게 넘어가는 순간, 왕 9단이 오히려 축을 착각하는 바람에 바둑이 싱겁게 끝났다.

전문가들이 보통 실수를 하면 단번에 알아차리는데 왕9 단은 끝까지 축이 안되는 걸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

당초 이번 도전기의 예상은 팽팽한 박빙의 승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과거 전적이나 경험으로 보면 조 혼인보의 우세가 점쳐졌다. 역대전적에서 4승1패로 앞서있는데다 혼인보전과 같이 제한시간 8시간의 이틀걸이 바둑을 둬본 경험이 있기 때문. 과거 혼인보전에서 조치훈 9단에게 도전했다가 실패한 류시훈(柳時薰) 7단은 “도대체 8시간을 어떻게 써야할지 당황스러워 제 기량을 발휘하기 힘들었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8시간 바둑은 경험이 중요하다.

이날 바둑을 관전한 문용직(文容直) 4단은 “도전자가 이틀걸이 7번기 바둑에 대해 지나친 부담감을 가졌던 것 같다”며 “그런 부담감이 아니라면 이 바둑과 같은 엄청난 착각은 프로 기사생활하면서 한번 있을까 말까한 중대한 실수”라고 말했다.

그러나 왕 9단은 최근 각종 기전에서 호조를 보이는 등 무서운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혼인보 도전권을 따낸데 이어 일본 메이진(名人)전에서도 5승1패의 성적으로 도전권을 넘보고 있었고 잉창치(應昌期)배 세계바둑대회에서는 4강에 올라 있었다.

따라서 바둑 전문가들은 1국이 이번 도전기의 향방을 가름하는 중요한 한 판이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조 혼인보가 승리하면 지난해 경험과 자신감이 살아나면서 승부를 유리하게 이끌고 왕 9단이 이기면 최근 폭발적인 기세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

또 이번 도전기는 현재 일본 바둑계의 노른자위 기전을 나눠갖고 있는 한국계와 대만계의 세력 판도를 가름하는 대결장이었다는 점에서도 관심을 끌었다.

현재 1위 기전인 기세이(棋聖)는 대만출신 왕리청(王立誠) 9단이, 2위 메이진은 조치훈 9단이 갖고 있다. 조 혼인보와 왕 9단중 각각 일본내 한국과 대만기사의 서열 2위라고 할 때 3위 기전인 혼인보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한국세의 우위 유지냐 대만세의 새로운 부상이냐가 결정난다.

더구나 조치훈 조선진의 성이 모두 조(趙)씨고 왕리청 왕밍완이 왕(王)씨여서 마치 성씨 대결을 벌이는 듯한 흥미로움도 더했다. 어쨌든 왕 9단이 ‘대착각’으로 도전 1국을 쉽게 놓치는 바람에 조 혼인보가 이번 도전기에서 절대적인 우위에 서게 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