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신간]김우창 '정치와 삶의 세계'

  • 입력 2000년 5월 19일 19시 49분


▼'정치와 삶의 세계' 김우창지음/삼인펴냄▼

‘생각’이 없는 사회가 잘 살 수 있을까? 개인이나 사회가 어떻게 살 때 “잘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잘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아무 생각 없이 살 때에도 사회는 잘 사는 것일까? 오랑우탄, 침팬지, 개코원숭이의 세계에서는 사는 것과 생각하기 사이에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해질녘 바위에 앉아 이를 잡고 있는 인도 라구르 원숭이를 보면 그 무심한 낯짝이 너무도 정갈하고 심오해서 도 터진 수도승의 얼굴 같기도 하고 환생한 간디 같기도 하다. ‘무심’이 생각 멸하기 혹은 생각하지 않기라면, 지금 우리 사회는 단연 무심의 사회이다. 아무도 좀체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 소리만 들어도 우리는 백리 밖으로 달아날 준비부터 한다. 그런데 어째서 현대 한국인의 얼굴은, 아이들만 빼고는, 그토록 추악한가? (어떤 관찰자에 따르면 우리의 얼굴을 추악성의 면에서 대표하는 것은 단연 ‘정치인의 얼굴’이다) 라구르 원숭이의 무심이 정갈하고 심오한 얼굴을 낼 수 있다면 우리의 무심은 어째서 정확히 그 정반대 효과를 내는가? 내가 지금 수년째 안고 다니는 미스터리 보따리 속에는 이런 질문들이 들어 있다.

김우창 교수의 근저 ‘정치와 삶의 세계’(삼인출판사)는 생각하는 사회와 생각하지 않는 사회가 어떤 차이를 내는지, 그 차이를 생각하는 것이 왜 중요한 일인지를 거듭거듭 생각하게 한다. 생각하게 하고, 생각한다는 행위의 경건성을 또 끊임없이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저술은 우리 시대의 유행과는 반대 방향에 있고 시대의 명령을 역행한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책에 ‘인기 없는 에세이’라는 제목의 것이 있다. 김 교수의 책이 ‘인기’가 있을지 없을지는 속단할 일이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인기를 생각했다면 이런 책은 쓰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다. 이 저술의 가치와 무게와 깊이는 거기 있다. 가치, 무게, 깊이라는 것들부터가 페품처럼 버려지고 있는 시대에 그것들을 다시 우리 앞에 챙겨내어 보인다는 것은 최상급의 인문학자가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낼 일이다. 그러나 이 역행의 용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역행이 바로 시대에 대한 최선의 인문학적 봉사라는 사실이다. 시대를 거슬러 말한다는 것이 어떻게 ‘시대를 위한’ 일인지를 이처럼 잘 깨치게 하는 책을 나는 근간에 본 적이 없다. 인문학자의 성찰과 사유가 시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최선의 전범을 우리는 이 책에서 만난다.

김 교수의 사유 항목들은 이 시대를 생각하면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외면하지 못할 광역 화두들을 거의 모두 포함한다. 정치와 정치지도자, 도덕과 정치와 경제와 사회, 투명성과 공공성, 이성과 합리성, 외면성과 내면성, 심미성, 근대적 성찰, 세계화, 탈근대론, 정체성과 사회화, 자유와 교육, 능률, 과학, 동양적 사유와 도덕, 성리학, 사회주의, 자본주의, 보편성과 삶의 구체성, 행복, 맑시즘, 자유주의, 너비와 깊이, 삶의 형이상학적 구조, 문명, 사회공간과 건축, 문학과 철학 등등의 문제들이 사유되고, 심지어 바다, 수평선과 수직선, 너비와 깊이와 어둠, 광대무변한 것에 대한 숭엄성과 신성성의 경험에 대한 사유까지도 들어 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같은 사유의 너비와 깊이만이 아니라 ‘사유의 불꽃’이다. 그 불꽃은 깔끔한 문제 정의와 선명한 개념화가 빚어내는 섬광일 뿐 아니라 어떤 논의도 단순화하지 않고 복잡성의 회로 속에 집어넣어 생각하는 독특한 사유방식에서 발산되는 광채이다. 그것은 짧은 합선의 불꽃이 아니라 치열한 대화의 불꽃이다. 생각한다는 것이 이처럼 불꽃 만들기이고 불꽃들의 축제일 수 있다면, 그것이 축제인 줄 안다면, 그 축제에 초대된다는 것은 큰 행복이 아닐 것인가!

이 책은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진단이면서 공시대적 분석이고 그 문제들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 결과에 대한 보고서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 보고행위는 극히 소중하다. 정치는 어떤 꼴의 것일 때 언필칭 ‘정치’인가, 삶은 어느 때 ‘진정한 삶’이 되고 너비는 왜 깊이를 요구하는가, 도덕주의와 사회화의 위험은 무엇이며 그 위험은 어떻게 방지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단견과 맹목의 포로임을 면할 수 있는가-예를 들면, 우리는 이 저술에 제기된 이런 문제들을 사회적으로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한두 가지 사족-도덕의 차원과 윤리의 차원에 대한 적절한 구분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회적 사유의 한국적 빈곤은 어떤 역사적 사정에 연유하는가? 이 책을 다시 낼 경우 김우창의 사유항목들에 대한 ‘색인’ 서비스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도정일(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비평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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