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동아 신춘문예/동화당선작]김명희 '눈 내린 아침'

  • 입력 2000년 1월 3일 08시 18분


안집은 이른 아침부터 떠들썩합니다.

연거푸 대문이 여닫히며 반기는 소리들이 잇따릅니다.

“기래.내일이 쥔집 냥반 환갑이라고 했디.”

문간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할머니가 혼자말을 합니다.

왁자한 웃음소리와 함께 여럿이 들어서는 소리가 들립니다.

“참, 벽동 할머니도 안녕하시지요? 인사라도 드려야겠네.”

할머니가 몸을 움칫 합니다.

“아마 주무실게다. 요즘 몸이 안 좋으신 지 자주 누우시더라.”

들려 오는 소리에 할머니는 허둥지둥 자리에 눕습니다.

도마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전 부치는 냄새도 풍겨 옵니다.

“우리네 고장에서리 잔치때문 손바닥만한 만두래 빚었디. 돼지고기래 너쿠 지지는 녹두 빈대떡도 올매나 맛나더랐는데.”

할머니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오릅니다.

“길케두 이런 겨울엔 고저 상 한가운데 뜨끈뜨끈한 전골 남비래 차지하고 앉아야디.”

할머니는 일어나 앉더니 종이 상자를 끌어당깁니다. 상자 안에는 광고지, 잡지에서 뜯어낸 종이, 담뱃갑 속 은박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그 중 한 장을 집는 얼굴에 생기가 돌며,

“내래 오늘은 전골 남비 받침을 한 번 만들어 보야디.”

중얼거립니다.

먼저 종이를 네모꼴로 자릅니다.반을 접고 다시 그 반을 접어 여러 번 문지릅니다. 가운데에 맞추어 네 모서리를 접습니다. 뒤로 돌려 다시 반으로 접은 후 폅니다. 선을 따라 접고 펴 가며 고깔모자 모양을 만듭니다. 고깔모자들이 겹쳐지면서 동그랗게 틀이 잡혀 갑니다. 받침을 만들며 할머니는 가족을 만납니다.

할머니의 고향은 평안북도에서도 가장 끝머리인,벽동군 벽동면입니다. 압록강도 지척인 그 곳에 어린 아이들과 시어른들이 있습니다.

새댁일 때,남편은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막내 딸아이가 첫 돌을 맞을 무렵,남편이 중한 병이 들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시어른들은 서둘러 할머니를 내려보냈습니다.

“…이내 삼팔선이 그어딜 줄 누가 알았갔네?”

언제부터인가 혼자서 말하는 것은 할머니의 오랜 버릇입니다.

얼마 뒤 남편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들이 재롱을 부리는지 노래 소리도 들려 옵니다. 웃음 소리와 박수 소리가 뒤따릅니다.

“내 새끼들이래 어더러케 지내는디.”

할머니는 잠시 손을 놓습니다.

혼자 된 뒤 할머니는 시장 한 모퉁이에 작은 가게를 내어 만두를 빚으며 살았습니다. 언젠가는 만날 가족을 생각하며 일에만 묻혀 지냈습니다.

“십년이문 강산도 변한다는데,그 다섯 곱절이래 더 디나지 않아써? 내래 가슴 뛰는 병이 들었디 뭐이가.”

할머니는 한숨을 쉽니다.

고향 길은 열릴 듯 하다가는 다시 막히곤 했습니다. 때마다 할머니의 가슴은 부풀어오르다가 내려앉기를 거듭했습니다. 기어이 병이 들어 가게도 그만두었습니다. 이 곳 변두리에 작은 문간방을 얻고,나머지는 이름을 숨긴 채 어느 보육원을 도왔습니다.

할머니 가슴은 늘 얹힌 듯 답답했습니다. 고향 쪽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것도 버릇이 되고 말았습니다. 방 안에 틀어박혀 밖에 나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다가 찾은 것이 받침 엮는 일이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밥 한 술 뜨고 난 후 접기 시작한 전골 냄비 받침은 늦은 점심 무렵에야 끝이 났습니다. 할머니는 흐뭇한 얼굴로 장롱 안의 받침들 위에 놓습니다.

“새식구레 들어와써. 사이됴케 지내라우, 잉?”

침침해진 눈을 비비며 밖을 내다봅니다. 가지만 앙상한 감나무에서 까치 한 마리가 웁니다.

“저 눔의 까치래 날 놀리는게디.”

두어 개 남은 감을 쪼아먹던 까치가 훌쩍 날아갑니다.

나물 무치는 냄새와 갈비찜 익는 냄새가 도란거리는 말소리에 실려 훈훈하게 번져 옵니다.

아기를 안은 젊은 내외가 서둘러 들어섭니다.

“먼 데 산다던 딸네로구만.”

숨듯 물러앉으며 방문을 닫습니다.

“우리 막냉이래 젖배는 안 곯았는디? 내래 한참이나 젖몸살을 앓디 않아써?”

빈 쭉정이 젖가슴이 찌르르 아파 옵니다. 막내를 위해 암죽을 끓이는 마음으로,작은 죽 냄비 받침을 엮기 시작합니다. 할머니는 다시 젊은 새댁으로 돌아갑니다.

“오마니. 우리도 달걀 찜 좀 해주시라요.”

다섯 살, 네 살 배기 아들 형제가 응석을 부리며 다가와 앉습니다.

“고럼, 고럼.”

할머니의 손은 부지런히 보시기 받침을 엮습니다. 문 밖에서 아이들 웃는 소리가 들립니다. 할머니 가슴이 마구 뜁니다.

“아니,내 새끼들이 온제 왔네?”

넘어질 듯 달려나가 대문을 엽니다. 어느 사이 나갔던 안집 손자들이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뛰어들어옵니다.

문설주에 기댄 채 고향 쪽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힘없이 돌아서다 가슴팍을 움켜쥐고 주저앉습니다.

“내 이러다 어더러케 되는 거 아니가?”

가슴을 문지르며 일어서던 할머니는 갑자기 두려워집니다. 방으로 들어와 허둥거리며 등을 켭니다. 불빛이 한꺼번에 어둠을 몰아냅니다.

안채에서는 저녁밥을 먹는 지,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이야기 나누는 소리들이 웃음소리와 함께 간간이 들려 옵니다.

멍하니 앉아 있던 할머니가 장롱을 열더니 그동안 만들어 놓은 받침들을 모두 꺼냅니다. 상을 정갈하게 닦고 소꿉이라도 놀듯 받침을 올려놓기 시작합니다.

먼저 전골 냄비용 큰 받침을 상 한 가운데에 정성스레 놓습니다.

“에미래 참 맛나게 끓앴구나!”

시어른들의 인자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할머니 입가에 웃음이 떠오릅니다.

이번에는 된장 뚝배기 차례입니다.

“님자,데지 않게스리 조심하우다.”

남편이 정겹게 속삭입니다.

계란 찜 보시기 받침 두 개를 올려 놓자, 아이들이 코를 벌름거리며 다가앉습니다.

마지막으로 암죽 냄비 받침을 올려놓으며,할머니가 흡족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봅니다.

“다들 맛나게 드시라요.”

“오마니가 해 주는 건 무어든 맛나요.”

다섯 살 짜리 큰 아이 얼굴이 바로 눈 앞에 있습니다.

“님자처럼 손맛이 됴흔 사람은 처음 보갔소.”

된장 찌개를 떠넣으며 남편이 껄껄 웃습니다.

“에미야, 식기 전에 너도 날레 와 앉으라마.”

시어머니가 옆자리를 내어 줍니다.

갑자기 할머니가 휘청거립니다.가슴을 움켜쥐며 스르르 모로 쓰러집니다. 아기들이 품에 와 안깁니다. 남편이 웃으며 손을 내밉니다.

눈 내린 아침입니다.

새로 지은 한복으로 차려입은 안집 내외가 자손들의 큰절을 받습니다. 환한 얼굴들로 둘러앉은 안방에는 벌써 봄이 와 있는 듯합니다.

막내 딸이 그릇마다 음식을 나누어 담더니 색동 상보를 덮습니다.

“할머니.”

방문을 두드립니다.

“벽동 할머니.”

“…….”

문을 엽니다. 자는 듯 누워 있는 할머니를 형광등만 껌벅이며 비추고 있습니다.

등 뒤에서 푸드덕, 소리가 납니다. 감나무 위에서 까치 한 마리가 가지를 차고 날아 오릅니다. 눈송이들이 떡가루처럼 흩어져 내립니다.

<글:김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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