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79)

  • 입력 1999년 4월 1일 18시 45분


나는 내 몸 속에 고로쇠 나무의 수액 같은 물이 그렇게 많이 솟아날 줄은 몰랐어. 나는 몸이 좀 불었단다. 먹기두 엄청 먹어대지. 잠은 왜 그렇게 쏟아지는지. 아아, 그에게 이 꼬마 천사의 잠 자는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보여줄 수가 있다면. 내게 시선을 한참 맞추고는 방글방글 웃기도 한단다. 처음에는 얼굴이 납작하게 보여서 무슨 부엉이 새끼처럼 보였더랬어. 그러더니 윤곽이 차츰 생겨나기 시작하고 눈두덩도 가라앉아 이젠 제법 계집아이처럼 보이는구나. 나하구 약속해야 돼. 어머니한테는 나중에 내가 말할테니까 넌 정말 입을 꼭 다물고 있어야 한다.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다. 내가 대학원을 마칠 때까진 아무래두 어머니가 돌봐 주셔야 할텐데. 그래, 걱정은 좀 되지만 그건 가족에 대한 것들뿐이야. 나는 오히려 힘이 솟아나고 살아갈 용기가 났어. 그리고 그림에 대한 강렬한 애착도 그래. 그리고 너 여기 올 때 아기용 침구와 옷가지들을 좀 사왔으면 한다. 나두 준비는 해두었지만 여긴 촌이라 그런지 좋은 게 눈에 띄지 않더라. 합성섬유 말고 면이나 그런 걸로. 어머니가 점포를 다시 확장했다니 다행스런 일이구나. 하여튼 우리 엄마는 남자로 태어났어야 해. 평생을 살림 꾸려 오시면서 한번도 기죽으신 일 없었고 남에게 빚진 적이 없잖아. 그뿐이야, 언제 우리 등록금 한번 밀린적이 있었니. 나두 어머니처럼 억척어멈이 되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단다. 너하구 얼굴을 마주 대하면 말하지 못할 것 같아 미리 적어 둔다. 언니로서 너에게 미안해. 그러나 이해해주기 바래.

정희에게

네가 왔던 게 벌써 한 달이나 지났구나. 지금 여기는 벌써 겨울이야. 남도의 겨울은 철새들이 날개에 담아 가지구 오지. 물오리들이 저수지와 개울가에서 우짖는 소리들이 들려와. 대나무 잎 끝이 누릿누릿 마르기 시작했고 감나무 꼭대기엔 까치밥만 몇 알씩 달려있다. 너두 찬성했지. 우리가 옛말 사전을 들추며 골라냈지. 은결이라구. 햇빛에 강물이 반짝이는 걸 은결이라구 한다지. 은결이는 이젠 막 기어다닐 정도야. 방이 좁아서 보행기에 얹어 놓을 순 없지만 그렇다구 바깥의 내 작업실 바닥에 내놓을 수도 없잖아. 방안은 온통 그애 물건으로 가득찼어. 여기서 우리는 겨울을 나고 봄에나 올라가게 될 것 같다. 네가 어머니에게 넌지시 말을 깔아 놓는 게 충격을 줄일지두 모른다구 그랬던 게 생각나. 그 때는 반대했었는데 어머니가 당장에 이리루 달려오실까봐 그랬어. 내가 여길 떠나기 며칠 전에 네게 편지하마. 그때쯤 말을 꺼내주지 않겠니? 너는 오 선생에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구 그랬는데 그건 절대루 안된다. 그에게는 지금 자신의 일 말고도 평생을 걸고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거야. 참, 그에게서 엽서가 왔어. 그는 무기징역으로 확정되었어. 나는 예상은 하구 있었지만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망연히 앉아서 그의 엽서를 몇번이나 보고 또 보고는 했어.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지만 그는 그 전에 나올지두 모르지. 하여튼 나는 그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해주지 않을 생각이야. 아니면 그가 스스로 알게 될 때까지 절대로. 어째서 이런 예감이 드는 걸까. 나는 다시는 그와 만날 수 없다는 불길한 생각으로 누웠다가 소스라쳐 일어나기도 해.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네가 은결이 얘기를 해주기 바란다.

<글:황석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