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만으로 위기 극복할 수 있나[동아광장/김석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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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정신 필요한 위기상황… 여당은 말실수에 오만하고 이중적
대통령 국회연설은 물음표만 양산… 철학-현장 없는 정치로 어쩔 텐가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정치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더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만 있고 당장 내일이 불투명해 적응하기 바쁜 개인에게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지식과 정보를 더 가진 정치는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의 변화를 점쳐 시대정신을 설정하고 자신과 함께 가자고 설득하는 법이다. 한 치 앞도 몰라 불안한 개인은 정치가 제안하는 방향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 어떤 사회에서나 정치가 설정하는 의제와 대안은 작은 희망의 불씨라도 손에 쥐어보려는 개인에게 나침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아무도 알 수 없는 게 내일이다.

2020년 상반기가 그랬다. 사실 31번째 확진자가 2월 18일 대구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접할 때만 해도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감염자려니 했다. 그가 신천지에서 가장 활동적인 사람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모든 게 변했다. 대구뿐만 아니라 전 국토가 기능을 멈췄고 함께 살아남자는 독려만이 귀에 들렸다. 가까스로 최악에서 벗어났다. 유권자는 안전과 위기 극복을 바라며 총선에서 여권에 힘도 실어줬다. 새로운 시대정신이 필요하다는 요구였다. 자연스럽게 문재인 정부가 집권 초반 제시한 5년의 청사진은 유물이 되어야 했다. 그 사이 새로운 시대정신이 담아야 하는 것들을 보여주는 사건들도 있었다.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공정성 논란으로 번졌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지난 수십 년간 자신이 세우고자 했던 ‘성차별 없는 사회’를 거역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몸집이 비대해진 여당은 퇴행적 말실수와 고압적 훈계, 그리고 오만과 이중성을 드러내며 새로운 시대정신에 적합한 집단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했다.

새로운 시대정신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쉽지 않은 질문이지만, 2020년 상반기의 경험으로 어렴풋이 정리할 수는 있다. 코로나19의 재확산, 경제 침체, 일자리의 질 악화, 기본권 침해, 취약 집단 배제와 같은 다중적이고 다층적인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그 꼭대기에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 미래 세대를 위해 공정하고 차별 없는, 덜 훼손된 세상을 물려줘야 한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의 21대 국회 개원 연설이 중요했다. 여기에는 집합적 두려움과 열망을 어루만지는 희망이 있었어야 했고 이를 실현할 구체적 방안이 제시되었어야 했다. 정치는 악플보다 무플을 더 무서워한다고 했던가. 인프라 투자, 각종 산업 육성, 산업 생태계 구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로 희망 심기를 시도했지만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정치는 녹색성장, 창조경제에서 생존력을 키운 관료들이 한 번 내놓았던 메뉴를 디지털과 그린이라는 양념을 쳐 다시 내놓은 속박이를 감별할 능력이 없다. 과거에도 등장했던 분야별 과제들이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로 이름만 바꿔 다시 등장하는데 우리가 귀를 열 필요는 없다. 희망이라도 심으려 했으나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대통령의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소득주도성장은 폐기한 걸까? 2년 안에 가능한 계획인가? 아니라면 진정성이 없다는 건데. 수십만 개 일자리가 이 구호만으로 창출될 수는 있을까? 일자리 수보다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격차를 줄이는 게 우선 아닌가? 디지털 경제는 대기업의 시장 개척에만 도움이 되는 건 아닐까? 부가가치는 원래 정보의 주인에게 되돌려줄 수 있을까? 디지털 경제의 확장에서 나타나는 플랫폼 노동의 폐단과 특수고용직의 어려움은 고려한 걸까? 정보인권은 후퇴하지 않을까? 그린 경제에 왜 세대 간 공정성의 핵심인 미래 세대를 위한 생태 보전에 대한 고민이 없지? 그린 경제는 왜 산업과 건설만 얘기하지? 태양광과 풍력 발전이 생태계 파괴에 미치는 영향은 고려한 걸까? 한국판 뉴딜은 성평등을 잊었나? 성과관리에는 관심이 없는 건가?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면 끝인가? 내가 낸 세금은?

통제할 수 없는 환경 변화로 엊그제 가리킨 쪽과 다른 곳으로 가자며 뻔뻔해지는 게 정치다. 그 뻔뻔함은 적절한 대안 제시와 설득으로 상쇄될 수 있다. 하지만 소통 없는 문재인 정부가 제시했던 적폐 청산, 촛불 정신, 공정 경제,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사회안전망 확보 등의 구호들이 어떤 결과를 낳았고 어디에 있는지 보라. 많은 지지를 받았어도 딱 한 번의 실기로 모두의 적이 되는 게 정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정치의 미덕은 긴 안목과 호흡, 그리고 기본기에 충실한 것이다. 그 미덕을 가지려면 철학이 있어야 하고 내공을 갖춰야 함과 동시에 현장을 잘 알아야 한다. 적어도 내가 주의 깊게 들은 대통령 연설과 시간을 써서 검토한 한국판 뉴딜에는 그 셋 중 아무것도 없었다.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시대정신#위기상황#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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