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권재현의 트랜스크리틱] ‘풀 포 러브’ 뒤에 숨은 ‘연기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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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15일 18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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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포 러브’의 주요 출연진들
‘풀 포 러브’의 주요 출연진들

연극·뮤지컬과 영화·방송을 비교할 때 역설적 현상이 발견됩니다. 연극·뮤지컬은 '배우의 예술'이라고 불리지만 상대적으로 배우의 출연료가 형편없이 낮은 반면 영화·방송은 '감독의 예술'로 불리지만 정작 배우의 출연료는 몇 갑절 높은 점입니다. 대학로 무대의 단골 주연배우가 영화나 드라마에 조연으로 한번 출연하면서 받은 돈이 1년간 연극출연료를 훌쩍 뛰어넘는 경우가 수두룩합니다.

물론 그 가장 큰 이유는 관객이나 시청자 규모의 차이에서 발생합니다. 영화나 방송에 비해 공연은 아무리 큰 극장에서 공연을 한다 해도 관객 숫자가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를 '연기의 경제학'으로 풀어보면 좀 색다른 설명도 가능합니다. 배우가 연기를 하면서 느끼는 만족도에 반비례해 출연료가 결정된다는 이론입니다. 쉽게 말해 배우의 만족도가 큰 공연에선 경제적 보상을 적게 받는 반면 배우의 만족도가 떨어지는 영상매체에 출연할 경우엔 경제적 보상을 더 받으려 한다는 것이지요.
'풀 포 러브'에서 연기하는 박건형과 김효진
'풀 포 러브'에서 연기하는 박건형과 김효진

배우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감독이라는 '제1의 관객'을 최우선으로 삼아야하는 영상매체보다는 다수의 관객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무대연기의 만족도가 훨씬 높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으로부터 커튼콜을 받을 때 느끼는 희열이 마약과 같아서 연극무대를 지킨다는 배우를 여럿 만났습니다. 반면 영상매체에 출연했을 때는 연기 신이 내려 기막힌 연기를 펼쳤는데 감독 맘에 안 들어 편집될 때 참 허망한 기분이 든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과거엔 무대를 거쳐 영상매체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근엔 거꾸로 영상매체로 스타가 된 배우들이 무대에 서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공연계에선 이를 '스타 마케팅'이라며 못마땅하게 보는 분들이 여럿 계십니다. 연기력 떨어지는 스타의 얼굴만 내세워 정작 공연의 질과 관객의 눈높이를 떨어뜨린다는 지적입니다. 스타의 출연료를 감당하기 위해 예술성 보다는 흥행성 위주로 작품선정이 이뤄져 공연생태계를 파괴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런 비판이 상당부분 현실과 부합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좀더 대국적 견지에서 이런 현상을 볼 필요도 있습니다. 영상매체로 스타가 된 배우들이 진짜 연기의 맛을 알기 위해 무대를 찾고 있고 그들을 좇아서 영화와 드라마에 익숙한 관객이 공연시장에 새롭게 진입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공연-방송-영화의 경계가 허물어짐으로써 세 장르를 넘나드는 연기자 풀(pool)이 형성되는 현상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즉 영화나 드라마로 스타가 되고 돈을 벌지만 배우로서 자기충전을 위해 적은 출연료를 감수하고 무대에 서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공연축제 '무대가 좋다'는 이런 '연기의 경제학'에 입각한 변화양상을 뚜렷이 보여주는 공연기획입니다. 대학로 공연기획사 악어컴퍼니와 CJ엔터테인먼트 연예기획사 나무엑터스가 손 을 잡고 투자 기획한 이 공연축제는 이달부터 내년 3월까지 9개월간 작품성을 인정받은 8편의 해외 연극을 무대화하면서 연출은 대학로 중견연출가에게 맡기되 배우는 대중스타를 적극 기용하는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그 첫 작품이 대학로 SM아트홀에서 공연 중인 연극 '풀 포 러브(Fool for Love)'입니다.
'풀 포 러브'의 박건형과 김효진.
'풀 포 러브'의 박건형과 김효진.

영화 '파리, 텍사스'의 대본을 쓴 샘 셰퍼드가 쓰고 출연까지 했던 이 연극은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아버지가 같은 이복남매의 저주 받은 사랑을 그린 작품입니다. 카우보이인 오빠 에디 역으로 박건형 한정수 조동혁 씨가, 레스토랑 요리사인 여동생 메이 역으로는 김효진 김정화 씨가 번갈아 출연합니다. 김정화 씨를 빼고는 모두 나무엑터스 소속 스타연기자입니다. 뮤지컬스타인 박건형 씨와 지난해 한양레퍼토리씨어터의 '한여름 밤의 꿈'으로 연극무대에 데뷔했던 김효진 씨를 제외하면 무대연기는 처음입니다. 박건형 씨도 뮤지컬 아닌 연극 무대는 처음이라고 합니다.

제작발표회장에서 이들의 표정엔 긴장감이 역력했습니다. 주로 카메라 앞에서 마이크에 대고 몇 초~몇 분 분량의 연기만 펼쳐온 그들이 1시간 반 가량 되는 시간동안 중단 없는 연기를, 그것도 무대는 물론 300석 안팎의 객석까지 꽉 채우는 에너지와 발성을 뿜어내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울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출연료가 높은 것도 아닙니다. 영화나 방송 출연료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출연료를 감수하면서 그들이 무대에 서는 것에 대해서 김종도 나무엑터스 대표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연극이건 영화건 방송이건 배우는 배우다. 우리가 손해를 보더라도 공연시장을 확장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배우들에게 도움이 된다."

그렇습니다. 공연은 관객이 적다지만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처럼 공연시장 역시 소수정예 관객을 겨냥한 고가의 수공예작업으로서 명품화 전략을 택한다면 영화나 방송을 능가하는 시장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연극무대에 서는 것은 스타의 연기훈련에도 큰 도움을 줍니다. 연극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배역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대본엔 전혀 등장하지 않는 그 인물의 개인사를 상상해 재구성하기도 합니다. "얘가 여기서 이러는 이유는 어린시절 어떤 트라우마를 겪었기 때문인데 그 구체적 내용은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는 식으로요. 쪽대본에 의존해 드라마를 촬영하거나 감독의 주문에만 기대어 영화를 촬영할 때는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연기가 연극무대에서 단련된 배우들의 연기에 비하면 아직 많이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전 박건형 씨와 김효진 씨가 출연한 공연을 봤는데 우려했던 것에 비해선 과히 나쁘지 않은 연기였습니다. 게다가 늘씬한 미남미녀가 바로 눈앞에서 공연을 할 때 안겨주는 짜릿함으로 배우들 못지않게 관객들도 긴장한 경험이 과히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만 김 씨의 연기는 아직 메이와 혼연일체가 되기에 부족했고 박씨는 너무 자연스러운 연기를 추구하다보니 작품이 지닌 신화적 구조를 간과한 채 리얼리즘 연기에 갇혀있었습니다.
'풀 포 러브' 공연사진. 왼쪽부터 김효진 남명렬 박건형
'풀 포 러브' 공연사진. 왼쪽부터 김효진 남명렬 박건형

사실 출생의 비밀이 얽힌 이복남매의 사랑이라는 '풀 포 러브'의 내용은 극단적 설정과 선정적 내용으로 시청자를 사로잡는 한국드라마와 많이 닮아 보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에디와 메이는 고교시절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이미 서로가 이복남매임을 깨닫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서로의 운명을 모른 채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랑이 불가능한 조건 위에 서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연극 속에서 그들 눈에만 보이는 아버지(남명렬)의 영혼은 그런 이율배반성을 상징합니다. 에디와 메이는 성격도 외모도 전혀 다른 두 명의 여성과 사랑에 빠졌던 바로 그 아버지라는 공통분모로 인해 깊은 사랑의 늪에 빠져듭니다. 동시에 바로 그 아버지로 인해 서로의 사랑은 금단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로 합쳐지기를 갈구하지만 정작 만나면 서로를 못 잡아먹을 듯이 싸우게 됩니다. 그들 사랑의 필요조건은 동시에 그들 이별의 충분조건입니다. 처음엔 매우 유별난 사랑처럼 느껴졌던 그들의 사랑이 사실은 보편적 사랑과 같은 구조에 묶여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사랑 때문에 그리워하지만 바로 그 사랑 때문에 헤어져야하는 '전쟁 같은 사랑'이 어디 그들만의 사랑뿐이겠습니까. 이런 연극의 신화적 묘미를 배우와 관객이 모두 나눠 갖는 축복이 되기를 기원해봅니다.

참고로 공연부문 미국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토니상에서 연극 부문 남우주연상은 댄젤 워싱턴에게, 뮤지컬부문 여우주연상은 캐서린 제타 존스에게 돌아갔습니다. 한국에선 글래머 스타로 인기 높은 스칼릿 조핸슨도 연극부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대중스타의 무대진출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지난해 토니상 연극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제프리 러시는 영화부문의 오스카상('샤인'), 방송부문의 에미상('피터 셀러스의 삶과 죽음'), 연극부문의 토니상('왕은 죽어간다') 3개상의 주연상을 모두 석권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트리플 크라운의 기록은 17번째였습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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