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용관]동북아 신(新)열국지

입력 2009-07-01 02:57수정 2009-09-22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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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김구용 선생이 옮긴 ‘동주 열국지’ 12권을 완독한 일이 있다. 그때 ‘대국(大國)은 명분을 잃으면 망하고, 소국(小國)은 명분만 좇다간 망한다’는 역설이 가슴을 쳤다.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까지의 중국 춘추전국시대는 역자의 말대로 약육강식 대자병소(大者倂小)의 암흑기였다. 선왕(先王)의 애첩과 동침하고 거기서 낳은 아들의 며느리가 될 여자를 가로채는 패륜이 나올 만큼 도덕과 선악의 기본이 정립되지 않았다. 크고 작은 열국(列國)이 명멸했고 헤아릴 수 없는 제후와 군신들이 패권을 다퉜다.

제자백가가 쏟아져 나와 주군과 천하를 도모하며 국제 질서를 잡아가던 그 시절에도 나라의 존망성쇠를 좌우했던 주 요인은 무력과 명분이었다. 종묘사직 보존에 급급했던 힘없는 나라들은 A나라가 쳐들어와 점령하면 A나라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다 B나라가 쳐들어오면 다시 B나라에 간과 쓸개를 내놓으며 비굴함을 감내해야 했다. 어쭙잖게 큰소리를 쳤던 많은 나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군사력만 믿고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며 위세를 보이다 쇠락해 스러져간 나라들도 숱하다.

요즘 동북아 정세를 보면서 새삼 열국지의 명멸했던 나라들이 떠오른다. 2000년 전 중국의 혼란스러웠던 정세나 지금의 불안정한 국제질서나 본질에선 크게 다르지 않다.

기독교 원리주의 성향의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명분으로 이라크전쟁을 일으켰다가 세계 지도국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한 것은 열국지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런 점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세계인의 마음속에 자리한 미국의 위치를 정확히 꿰뚫고 있는 듯하다. 미국의 진짜 위기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의 약화가 아니라 바로 ‘오만함’에서 비롯됐다. ‘하드 파워’가 아니라 ‘소프트 파워’의 빈곤이 위기의 핵심이라는 진단인 셈이다.

최근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보여준 ‘겸손함’과 ‘진지함’, 대화를 통해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고 공통분모를 찾으려는 모습은 신선했다. 북핵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단호한 태도가 전임 대통령의 쇠주먹에 비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세계와 대화하고 소통하며 대북 정책의 명분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갖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는 북한은 지금 진짜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큰 나라도 작은 나라도 아닌 우리나라는 늘 국제정세에 맞춰 창조적인 외교의 길을 개척해갈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권이 제시했던 ‘동북아균형자론’이 주변국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흐지부지 사라진 것도 국제 질서의 냉혹함을 읽지 못한 아마추어 구상이었기 때문이다.

현 정부 들어 금융위기 속에서 주요 20개국(G20) 의장국이 됐지만 세계를 주도할 선진국이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명박 대통령의 ‘신(新) 아시아 구상’과 북핵 해법을 위한 ‘선(先) 5자 협의’ 제안 등이 어떤 결실을 맺을지 궁금하다. 금방 엄청난 성과가 나올 것처럼 낙관할 것도 없고 쉽게 비관할 필요도 없다. 시간을 두고 착실하게 국제사회와 소통하며 내실을 다져가야 한다. 이것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외치(外治)에서뿐만 아니라 내치(內治)에서도 그렇다.

정용관 정치부 차장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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