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남진우]정치허무주의 불길한 그림자

  • 입력 2006년 6월 16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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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터넷 게시판이나 댓글을 살펴보면 심심찮게 눈에 띄는 제목이 있다. “이게 다 놈현 때문이야”라는 문구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여기서 ‘놈현’은 지금 이 나라에서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 있는 사람의 이름을 장난스러우면서도 불경스럽게 부른 것이다.

대개 온라인에서 어떤 쟁점이나 화제를 놓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다 어느 한편이 “이게 다 놈현 때문이야”라고 하면 그걸로 논란이 종결되곤 한다. 그런 말을 한 측이나 받아들이는 측이나 이 말의 의미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으며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를 끝내는 수순으로 그 문구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얼마 전 할리우드 스타 커플인 브래드 피트와 앤젤리나 졸리가 아이를 낳았다. 그러자 피트의 전 애인으로 역시 유명한 여배우인 제니퍼 애니스턴이 한 인터뷰에서 “이제야 겨우 지겨운 삼각관계가 끝난 모양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피트와 관계를 정리한 후에도 언론의 과도한 관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던 처지의 애니스턴으로서는 응당 할 만한 소리였다.

이 말이 인터넷에 뜨자 수많은 댓글이 따라붙었는데 역시 압권은 “이게 다 놈현 때문이야”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문장이 “이들의 삼각관계가 끝나갈 동안 놈현은 도대체 어디서 뭘 했단 말인가?”였다. 이쯤 되면 실소밖에 나올 것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이 유행하는 세태의 이면엔 단지 실소만 하고 지나가기 힘든 무엇이 있는 듯하다.

이들 누리꾼은 한국 축구가 어느 나라에 패해도 “이게 다 놈현 때문이야”라고 말하고, 해외에서 한국인 관광객이 무슨 추태를 부려도 “이게 다 놈현 때문이야”라고 강변하고, 국제 유가 상승으로 국내 휘발유 값이 올라도 “이게 다 놈현 때문이야”라고 주장한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이처럼 모든 게 “놈현 때문”이라면 정작 ‘놈현’으로 지칭되는 인물이 반드시 책임져야 될 사안과 그렇지 않은 사안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고 적절한 비판이 요구되는 순간 헛웃음으로 사태를 봉합하는 역효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점이다. 예상과 달리 “이게 다 놈현 때문이야”라고 발언하는 사람 가운데 현 정부에 대한 비판자들만이 아니라 지지자들도 일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게 다 놈현 때문이야”라는 말에는 논리적 사고를 무시하고 모든 것을 감성적이고 즉흥적인 호오(好惡)의 문제로 치환하는 젊은 세대의 냉소주의와 정치 허무주의의 불길한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이어서 생각해 볼 것은 “이게 다 놈현 때문이야”라는 말을 일종의 패러디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는 점이다. 현 정부는 집권 이후 자신의 역량 부족과 균형 감각 상실로 발생한 다양한 정치 사회적 현안을 정공법으로 해결하는 대신 보수언론이나 서울 강남에 거주하는 특정 계층 탓인 양 몰아가는 데 혈안이 돼 왔다. 물론 그런 논법은 한때 지지자들을 동원하고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는 데 유효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떠넘기기식 속죄양 만들기 수법은 약효를 다한 것으로 보인다. “모든 게 다 조동중 때문이야”라며 언론 환경을 탓하기 바쁜 권력자와 그 주변 인사들은 자신의 발언이 “이게 다 놈현 때문이야”라는 누리꾼의 패러디에 의해 결정적으로 희화화되어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피트-졸리-애니스턴의 삼각관계가 끝난 게 “놈현 때문”이라는 발언이 황당한 것만큼이나 엉뚱한 데서 언론 환경을 걸고넘어지는 현 정부의 태도 역시 우습기는 마찬가지다.

민주화 시대에 정치 지도자의 리더십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군사독재 시절 권력자는 물리력에 의한 공포를 지배 수단으로 썼다. 대다수 국민에게 권력자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어제의 민주투사가 오늘의 권력자로 등극했지만 그들의 무능과 부패는 국민의 실망을 자아냈다. 그 결과 권력자는 국민의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노무현 정부 들어 정치 지도자는 혐오를 넘어 거의 무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다. 아무리 탈권위주의 시대라 하지만 세상만사를 “이게 다 놈현 때문이야”라는 말로 냉소하는 세태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국민은 존경과 선망을 받는 정치 지도자를 가질 권리가 있다. 이 당연한 사실이 아득하게 여겨지는 데 현 단계 한국 사회의 비극이 있는 듯하다. 이게 다 “놈현 때문”일까?

남진우 시인·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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