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장길남]주경야독 그 시절, 산업체부설학교의 추억

  • 입력 2006년 2월 7일 03시 05분


코멘트
폐교를 앞둔 산업체 부설학교 양백상고가 4일 마지막 졸업식을 했다(동아일보 2일자 A11면 참조).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들과 함께 마지막 졸업식을 치르던 그 시간, 머릿속에는 스승과 동문들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벌써 25년 전 솜털이 보송보송한 열일곱 어린 나이에 정든 고향 부모형제를 떠나 낯선 충북 청주로 발걸음을 옮겨 대농부설여자실업고(양백상고의 전신)의 문을 두드렸다. 가녀리던 손에 굳은살이 덕지덕지 붙는 현장근무가 고달파 학업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숱하게 있었지만 고향의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버텨 낸 시간들이었다.

150cm 남짓한 작은 키로 거대한 기계와 맞서 주야간 3교대로 잠 못 자고 그야말로 개미처럼 일해서 받은 월급이 고작 10여만 원이었다. 그 돈을 쪼개 병석에 계시는 아버지 약값과 동생 학비를 보내고 나면 손에 남는 건 몇 푼 안 됐지만 더 나은 내일이 있을 거라는 꿈과 희망으로 참고 이겨냈다.

하루 평균 4시간 남짓한 취침시간을 쪼개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이것을 인화하며 즐거움에 가슴 설레던 교문 앞 사진관, 길게 늘어선 줄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배식 받던 구내식당, 쥐꼬리만 한 월급을 쪼개 적금 붓고 시골집에 생활비를 부치고 수많은 군것질거리는 눈요기만 하던 구내 구판장. 10여 년이나 늦게 고등학교에 입학한 늦깎이 언니들과 함께 공부했던 교실에서 선생님들은 피곤에 지친 학생들의 머릿속에 한 자라도 더 넣어 주려 열변을 토하셨다. 겨울철에도 섭씨 30도가 넘고 여름이면 48도까지 올라가는 현장온도도,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폭주하는 업무량도 우리들의 향학열을 꺾을 수는 없었다. 고맙고 행복하지만 한편 슬프고도 가슴 아린 이야기들이 살아 숨쉬던 곳이다.

그동안 경제가 발전하고 시대 상황도 바뀌어 산업체 부설학교가 거의 없어졌다. 이제 양백상고의 폐교로 부산의 시온실업고만 남게 됐다고 한다. 때론 돌이키고 싶지 않을 만큼 아프고 힘든 순간이었지만 친정어머니의 미소처럼 따스하고 새로운 힘과 용기를 내는 원천이었던 모교.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찾아와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시던 고마우신 은사님.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음이 나오던 10대 소녀들의 즐거운 재잘거림이 아직도 귓전에 맴도는데 폐교라니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하지 않는다. 1970, 80년대 산업역군임을 자부하던 1만3000여 동문은 우리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어엿한 사회의 기둥이 되어 각계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다.

비록 세상이 바뀌어 산업체 부설학교는 없어지겠지만 배움에 대한 의지는 어느 시대에나 필요하다. 그 정신만은 꿋꿋이 이어지길 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자만이 인생의 참맛을 안다고 하지 않던가. 형편이 어렵고 사정이 힘들수록 배움은 필요하다는 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장길남 양백상고 총동문회장 보험설계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