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광표]98세 日고고학자의 편지

  • 입력 2005년 12월 3일 03시 00분


코멘트
최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이건무(李健茂) 관장의 사무실에서 우연히 한 통의 편지를 읽게 되었다. 일본의 교토에 거주하는 98세 고고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씨가 이 관장에게 보낸 편지였다.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식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는 노쇠해 교토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국립박물관이 처음 개관했던 1945년 12월 3일이 생각납니다. 그날은 월요일이었죠. 눈 내린 경복궁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개관식은 미국 군정관과 한국 측 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오전 10시부터 진열관 중앙홀에서 시작됐습니다…무사히 박물관을 인도하게 되어 다행이었습니다….’

기자는 이 편지를 읽고 3일이 한국의 국립박물관이 처음 개관했던 날임을 비로소 알았다. 사실 새 박물관에 가슴 설레며 즐거워했던 사람들, 특히 문화재 관계자들 가운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는 그동안 뿌리를 소홀히 하고 새 박물관에만 관심을 쏟았던 건 아닐까.

아리미쓰 씨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조선고적연구회 경주사무소에 근무하면서 경주 부여 평양 등지의 유적을 발굴했던 인물. 그래서 누군가는 이 편지를 놓고 그가 총독부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품이나 실력, 객관적인 시각 등에서 그는 한국 고고학계의 귀감이다. 백수(白壽·99세)를 눈앞에 둔 그는 올해 초 자신이 1943년에 발굴했던 평양 낙랑고분의 발굴보고서를 발간했다. 학자로서의 사명감을 저버리지 않고 60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다. 2000, 2002년에도 다른 한국 유적 발굴보고서를 낸 바 있다. 발굴 성과를 올리는 데만 급급할 뿐 기록을 남기는 데는 소홀한 학자들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성실함은 많은 사람을 숙연하게 했다.

2일 오후 중앙박물관에선 60년 전의 국립박물관 개관을 기념하는 조촐한 행사가 열렸다. 중앙박물관 차원의 공식 기념식은 처음이었다. 60년 전처럼 눈이 내리진 않았지만, 국적을 떠나 자신의 일에 성실했던 사람들이 모여 서 있는 소박한 설경(雪景)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듯했다.

이광표 문화부 kp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