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녕]어느 여당 의원의 넋두리

  • 입력 2005년 11월 9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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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안택수 의원이 국가 정체성에 대해 질의할 때 이해찬 총리가 거의 말도 못하게 면박을 주는데도 야당 의원들은 그저 웃고만 있더라. 우리가 야당 하던 시절이면 박살을 냈을 것이다. 자리에 앉아 있기가 민망했다. 국회의원의 질의에 좀 문제가 있더라도 총리의 그런 답변 태도는 뭔가 잘못됐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이 최근 본보 정치부 기자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한 말이다. 국회의 대정부질문이 끝난 직후여서 화제는 자연히 이 총리의 답변 태도로 옮아갔고, 그러자 이 의원은 같은 당 동료 의원들의 얘기를 전하면서 자신의 느낌도 보탰다. 한마디로 이 총리의 태도가 볼썽사나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원이 진짜 얘기하고 싶어 한 핵심은 이 총리의 답변 태도 자체가 아니라 그 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국회의 권위 추락이었다.

이 의원은 “한나라당 사람들이 너무 심하게 나오면 한두 번 반박해도 되지만 총리가 아예 이야기도 못하게 핀잔을 주는 것은 입법부 경시가 아니고 뭐냐”고 개탄했다. 이 총리의 고압적인 자세를 여당 의원이라고 해서 그냥 보고 즐길 때가 아니라는 얘기였다.

땅에 떨어진 국회의 권위에 대한 이 의원의 자성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정부와 여당의 당정협의는 양질의 법안 마련을 위한 생산적인 자리여야 하는데 실제는 행정부 관료가 ‘자질 떨어지는’ 의원들에게 단순히 법안을 설명해 주는 자리로 전락했다고 그는 말했다. 요컨대 “야당에서 이렇게 문제 제기하면 이렇게 반박해라”고 가르치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비단 이 의원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국회의 위상 저하를 보여 주는 사례는 많다. 검찰과 경찰이 갈등을 빚고 있는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 논의에서 국회가 처음부터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뒤늦게 허둥지둥 검경수사권조정기획단을 만든 것도 그중 하나다.

“국회가 주도해 관련법을 고쳐야 하는 입법 사항인데도 왜 당사자들한테 맡겨 나눠 먹기 식으로 조정하도록 했는지 모르겠다”고 자탄하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입법은 전적으로 국회의 몫인데도 국회가 팔짱을 낀 채 바라보기만 한 것은 스스로의 권한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재판에서의 공판중심제 도입 등을 둘러싼 검찰과 법원의 갈등에서도 추락한 국회 위상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의 구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개추위는 성격상 사법개혁을 위한 입법 추진기구이기 때문에 대법원이 국회에 구성을 건의하는 게 순리인데, 국회가 아닌 대통령에게 건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법을 다루는 대법원이 이 점을 모를 리 없건만 대통령을 선택했다는 것은 결국 국회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법하다.

이 같은 국회의 위상 추락은 누구의 책임인가. 국회에서 여야가 편을 갈라 서로 제 얼굴에 침 뱉기 식으로 싸우는 사이 국민은 물론이고 행정부와 사법부에도 업신여김을 당한 결과가 아닐까.

식사 자리를 파하기 전 이 의원이 던진 마지막 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개혁이 별거냐.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되돌리는 것이 개혁 아니냐. 여야 관계에만 매달릴 게 아니라 국회와 행정부의 관계부터 정상화해야 할 것 같다.”

이진녕 정치부장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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