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허영]또 드러난 후진적 법치문화

  • 입력 2005년 10월 15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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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사리에 맞지 않는 수사지휘권 행사에 대해 김종빈 검찰총장이 이를 수용하고 사표를 제출했다는 보도는 충격적이다. 검찰총장이 고뇌 끝에 내린 결정이겠지만 참으로 유감스럽다. 법무부 장관의 지시를 거부해 검찰권도 지키고 당분간 자리를 지켰어야 한다. 검찰총장의 2년 임기제는 그래서 만든 것이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법률상의 위계질서는 장관의 부당한 지시까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천 장관의 이번 처사는 처음부터 헌법과 법률의 기본정신을 왜곡한 견강부회적인 처사였다. 헌법상의 신체의 자유 및 학문과 사상의 자유는 반드시 존중해야 한다. 장관의 말대로 불구속 수사의 원칙이 헌법정신이라는 것도 맞다. 그러나 헌법상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를 인정하는 전제 아래서만 보호받을 수 있는 기본권이라는 사실을 법무부 장관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우리 헌법은 독일처럼 기본권 실효(失效)제도를 두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위헌 정당 해산제도를 통해서 방어(防禦)적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이유는 자유를 악용해서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민주주의를 공격하는 방종적 자유만큼은 제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북한의 공산 세습 체제를 숭상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며 우리나라의 기본가치를 폄훼하는 한 돌출 교수의 신체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가 우리 헌법이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 기본가치보다 우위에 있을 수는 없다.

법무부 장관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이지 한 몽상가의 철없는 좌충우돌적인 언행이 아니다. 우리 헌정사상 처음으로 행사하는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이라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좀 더 명분 있는 사건을 선택했어야 한다.

천 장관은 수사지휘권에 대해서도 아전인수식으로 오해하고 있다. 검찰 수사도 행정행위의 하나로 법무부 장관이 정치적 책임을 지므로 지휘권을 주되 권한의 정치적 남용을 막기 위해 ‘구체적 사건에 대해 검찰총장만을’ 지휘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이 같은 취지에 충실하자면 지휘권은 검찰이 수사권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에만 행사돼야 하며, 특히 법무부 장관은 정치적 외압으로부터 수사의 독립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정당한 검찰권의 행사를 막기 위해서 수사지휘권을 발동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적인 행동이다.

천 장관이 강조하는 신체의 자유와 불구속 수사의 원칙만 하더라도 엊그제까지 법무부와 검찰이 이번처럼 지키려고 신경 쓴 일이 과연 있었던가. 그토록 인권 의식이 투철한 장관이라면 구속 수사가 수사의 관행처럼 일상화되고 있는 데는 왜 말이 없었는가. 공평하게 법을 적용하고 집행하는 것은 정의의 영혼이다. 유독 반국가사범에게만 학문의 자유와 불구속 수사의 원칙을 적용하려는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은 법 적용의 평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정의의 파멸이고 우리 자유민주주의체제의 무장해제를 뜻한다.

검찰총장은 좀 더 원칙에 충실했어야 한다. 검찰권의 총수로서 여러 상황이 어렵기는 하겠지만, 법 정신을 오해한 법무부 장관의 부당한 수사지휘에 따르기보다는 자유민주주의 헌법질서의 수호를 위해서 결연한 태도를 보였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의 심판을 기다렸어야 한다. 사퇴할 사람은 검찰총장이 아닌 법무부 장관이기 때문이다.

사실 피의자의 구속 수사 여부는 검찰의 권한이 아니다. 법무부 장관이 간섭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검찰은 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할 수 있을 뿐이다. 구속 여부는 법관의 전속 권한이다. 법관의 권한에 속하는 한 피의자의 구속 여부를 놓고 장관과 검찰총장이 벌인 이번 사태는 우리 법치문화의 후진성을 그대로 보여 준 상징적인 사건이다.

허영 명지대 초빙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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