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14년 유길준 사망

  • 입력 2005년 9월 30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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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의 대표적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유길준(兪吉濬·1856∼1914)은 조선시대 서울의 양반 거주지인 계동에서 태어났다. 북촌의 다른 명문가 자제들처럼 그도 어릴 때 10년간 한학(漢學)교육을 받는다. 촉망받는 인재로 주변의 기대를 모았지만 북학파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였던 박규수(朴珪壽)를 만나면서 진로가 바뀐다.

그는 박규수를 통해 중국에서 수입된 근대학문에 열중한다. 그러나 10년간 받은 전통 유교교육 덕분에 근대 서구문물에 휘둘리지 않고 이를 비판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고 역사학자들은 지적한다.

유길준은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선발돼 일본으로 건너가 개화상을 살피고 게이오(慶應)의숙에 입학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된다. 1883년에는 다시 견미보빙사(遣美報聘使)의 일원으로 미국에 건너갔다가 민영익(閔泳翊)의 지시로 남아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다. 이후 그는 2년간 대학예비학교인 더머 아카데미에서 서양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귀국하자마자 갑신정변에 연루돼 7년에 걸친 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기행문인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썼다. 이 책은 얼핏 보면 서양문물 소개서 같지만, 행간에 한국의 전통과 서양의 근대를 엮어 어떻게 ‘조선형 근대화’를 완성할 것인가 하는 개화사상가의 고민이 숨어 있다. 최근 국내학자들 사이에 유길준의 ‘서유견문’ 읽기 붐이 일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후 그는 내무대신 등을 지내며 갑오개혁을 이끌었지만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러시아 정권이 수립되자 일본으로 망명했고, 1907년 헤이그 특사파견으로 고종황제가 물러난 뒤 귀국했다.

그는 일본과의 신뢰를 돈독히 하면서 문명화를 꾀했지만, 일본이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후에는 친일적 태도를 버리고 반일 인사로 돌아섰다. 1910년 한일늑약 체결 직후 일제가 남작 작위를 주려 했으나 끝내 받기를 거부한 것에서도 그의 반일 성향이 확인된다. 그는 문명화 과정에서도 민족의 자주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1911년 중앙학교 교장으로 선임돼 후진 교육에 정열을 쏟던 그는 지병인 신장염이 악화돼 1914년 9월 30일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거행됐다.

윤정국 문화전문기자 jky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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