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도청의 그늘

  • 입력 2005년 9월 30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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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 정권 말기이던 2002년 10월 25일 동아일보가 1면 머리기사로 국가정보원의 휴대전화 도청 사실을 고발했을 때 필자는 그 기사의 사실성을 반신반의(半信半疑)했다.

필자는 당시 정치부 차장으로 있었다. 그 기사를 특종 보도한 사회부 최영훈(崔英勳) 차장이 이듬해 6월과 7월 검찰에 소환돼 12시간, 10시간씩 조사를 받을 때도 필자는 국정원 도청을 정권 변동기에 나도는 ‘음모론’의 하나쯤으로 생각했다.

김대중 정권 사람들은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길길이 뛰었다. “대통령님은 가톨릭 신자다. 알지 않느냐. 나도 가톨릭 신자다. 대통령님이 거짓말하는 것 봤느냐. 나도 한평생 거짓말은 모르고 살았다.” 핵심 실세는 가톨릭까지 들먹였다.

“자네가 언론계 후배라서 그래도 나가라는 소리는 않겠다. 하지만 솔직히 얼굴도 쳐다보기 싫다.” 언론사 출신의 여권 인사는 취재차 사무실을 방문한 필자의 면전에서 이런 말을 서슴지 않았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대통령님이다. 도청이라니…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들은 의심하는 마음이 오히려 죄스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결백을 호소했다. 10년 넘게 정치부 기자 생활을 한 필자의 판단을 마비시킬 정도였다. 필자의 귀는 얇아질 대로 얇아졌고, 명색이 동아일보 정치부 차장이 동아일보의 1면 머리기사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있을 수 없는 도덕적, 직업적 위기였다.

그러나 동아일보 보도는 사실이었다. ‘도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청 장비가 있을 리 없다’던 김대중 정권 시절의 국정원도 도청을 했음이 하나 둘씩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정작 음모론의 포로는 필자였음도 분명해졌다. 동아일보와 독자들께 죄송하다.

도청의 그늘은 아직도 깊다. 그 습한 그늘은 R-2니, 카스(CAS)니 하는 도·감청 장비에 있지 않다. 김영삼(金泳三) 정권이니, 김대중 정권이니 하는 ‘내 탓, 네 탓’에 있지 않다. 국정조사를 해야 하느냐, 특검을 실시해야 하느냐에도 있지 않다.

도청의 그늘은 자각하든, 자각하지 못하든 인간성을 파괴한다는 데 있다. 사람들을 소외(疏外)의 심연에 가둔다는 데 있다.

국정원의 자체 조사 결과 발표가 있은 뒤 김대중 정부 당시 국정원의 책임자들이었던 이종찬, 임동원, 신건 씨가 김승규 현 국정원장을 만나 또 다른 음모론을 제기했다. 본질은 김영삼 정권 시절 국가안전기획부가 밥 먹는 자리의 대화를 ‘녹음’한 것인데 국정원이 ‘전화 도청 문제를 끼워 넣어’ 김대중 정권을 속죄양처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성동격서(聲東擊西), 그러니까 동쪽(YS 정권)을 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서쪽(DJ 정권)을 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배덕자(背德者)의 자괴에 빠져 허우적대는 필자에 비하면 그들의 지칠 줄 모르는 음모론이 부럽기까지 하다. 묻고 싶다. 그래서 어디로 가려는가?

국정원 직원들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동아일보를 상대로 소송을 냈을 당시의 원장이던 신건 씨에게 특히 묻고 싶다. 부하 직원들에게 소송을 내도록 직접 지시를 했건 안 했건 결과적으로 그들의 인격을 파괴하고, 소외의 심연으로 밀어 넣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김창혁 국제부 차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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