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서민 정부’의 苛斂誅求

  • 입력 2005년 9월 26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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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애국자는 수없이 많았지만 세금을 더 내겠다고 나선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세금 내기 싫어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경제적 동물)’의 본성을 드러내 주는 말이다. 역사적 사건의 뿌리에 조세 저항이 있었던 것은 바로 세금문제가 갖는 이 같은 인화성(引火性) 때문이다.

서구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이정표인 영국의 마그나카르타(1215년)도 ‘법의 근거 없이 세금을 함부로 거두지 말라’는 귀족들의 요구를 왕이 수용한 문서일 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79년 10·26사태(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원인(遠因)을 제공한 부마(釜馬)항쟁은 부가가치세 도입에 따른 민심이반이 민주화 요구와 결합돼 일어난 것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서민의 정부’를 자처하며 출범했다. 그러나 역대 정부 가운데 가장 ‘서민 지갑을 얇게 만든 정부’로 평가받을 가능성이 큰 것 같다. 700조 원의 각종 국책사업 비용, 이 바람에 내년에는 280조 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재정적자, 여기에다 옛날 연탄 값에 해당하는 액화천연가스(LNG) 값에다 소주 값까지 증세(增稅)로 올리면서 신용카드 공제한도와 중소기업 법인세 감면 혜택은 줄일 계획이라고 한다.

5공화국 시절이던 1980년대 초 “물가를 잡으라”는 대통령의 한마디에 국세청 직원들이 미용실 목욕탕 다방 등을 완장 차고 돌며 ‘지도가격’을 지키는지 감시했다. 최근 부동산을 세금으로 때려잡겠다는 정책은 20여 년 전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국세청의 한 간부는 “세금으로 시장을 통제하겠다는 것은 정책 결과를 즉각 보여 주겠다는 전시행정적인 발상”이라며 “그런 점에서 권위주의 정권과 포퓰리즘 정권은 닮은 점이 있다”고 꼬집었다.

문제는 경제와 세금에 관한 노 대통령과 참모들의 안이한 인식이다. 연정(聯政) 공방 속에서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 논란이 일자 청와대 측은 “노 대통령이 일주일에 두 번꼴로 경제 관련 회의를 주재하거나 민생현장을 방문하고,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보고서의 70%는 민생경제와 관련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책상 앞에 아무리 오래 앉아 있어도 여학생 ‘스토킹’할 생각에 빠진 학생은 공부를 잘할 수 없다. 이 점에서 “대통령은 경제성장률 1∼2% 올린다고 역사에 남겠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한 여당 의원의 전언은 시사적이다.

더욱이 정권의 ‘코드’를 장악하고 있는 청와대 386참모들과 여당 내 386의원의 상당수는 운동권 시절에 샐러리맨들이 내는 갑종근로소득세(갑근세)를 내본 일도, 몇 푼 더 돌려받으려고 각종 영수증 챙겨 세금정산 서류를 내본 일도 없다. 그런 그들은 “경제가 언제 대통령이 챙겨서 잘 됐느냐” “박정희 아니었더라도 경제발전은 이뤄지게 돼 있었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런 사람들이 세금 무서운 줄 모르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서민의 정부’는 서민의 눈물을 닦아 주고 편안한 삶을 보장해 줘야 할 정부다. 서민지갑에서 세금 마구 걷어 펑펑 쓰는 정권은 다름 아닌 가렴주구(苛斂誅求) 정권이다. 그래도 노 대통령이 민심을 모르겠다면 정대철 전 의원의 최근 건의를 되풀이하고 싶다. “미복(微服) 차림으로 암행이라도 다니시라.” 그것이 민생고에 시달리는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듯하다.

이동관 논설위원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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