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연 히틀러는 자신의 발아래 고꾸라져 ‘제발 베를린을 떠나 달라’고 읍소하는 여인에게 나지막이 내뱉는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다시 문이 닫히고 한 발의 총성이 울린다. 근처 계단에 앉아 있던 괴벨스의 어린 아들이 반사적으로 ‘명중!’이라고 외친다. 병사들은 머리에 총을 쏜 히틀러와 독약 앰풀을 삼킨 브라운의 시신을 미리 파둔 구덩이에 옮긴 뒤 석유를 붓고 불을 붙인다.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몇 명의 병사와 장군들이 손을 들어 ‘히틀러식 경례’를 붙인다….
이 영화에는 히틀러의 측근들이 ‘연합군과 강화(講和)해 국민들의 목숨을 보전하자’고 진언하는 모습이 거듭 등장한다. 그러나 ‘총통’은 “패배한 민족은 멸망이 당연해. 생명력 넘치는 동방의 민족이 우리를 대신하게 될 거요”라고 내뱉는다.
독일 역사학자 요아힘 페스트는 히틀러가 ‘승리의 의지’를 빼앗긴 뒤 맹렬한 ‘멸망의 의지’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분석한다. 그가 사랑한 바그너의 음악극 ‘신들의 황혼’에서 천상의 발할라 성(城)이 불길에 타오르듯, 철저히 파괴되어 장엄하기까지 한 몰락을 원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라진 히틀러였지만 그 뒤 수십 년 동안이나 ‘생존설’이 그치지 않고 떠돌았다. ‘서방과의 단독강화를 포기하는 대가로 소련에 건너가 조용히 살다 1971년 사망했다’, ‘성형수술을 받은 뒤 남미로 날아가 농장주로 지냈다’…. 그러나 소련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50년대 후반 귀환한 히틀러의 주치의들은 “소련군 관계자가 불에 탄 중년 남자의 이빨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히틀러의 치열(齒列)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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