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함인희]‘콘트라 섹슈얼’과 한국사회

  • 입력 2005년 2월 1일 18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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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 섹슈얼’ 여성이 뜨고 있다?

30대 중반까지는 자신의 성공에 ‘다걸기(올인)’하는 여성, 이름하여 콘트라 섹슈얼이 부상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영국 미래학연구소에 따르면 20대를 중심으로 결혼과 출산이란 전통적 역할 기대를 과감히 거부한 채 연애는 필수이나 결혼은 선택이요, 경력에 장애가 되는 한 출산은 파업이며, 거액의 연봉을 성공의 지표로 삼는 여성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성공의 확신이 손에 잡히기 전까지 결혼과 출산을 열외로 간주하는 이들 콘트라 섹슈얼의 등장은 서구만의 현상은 아니다. 한국처럼 ‘결혼=정상, 독신=일탈’을 규범으로 하는 문화권에서도 그 맹아가 발견된다. 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여성 10명 중 3명이 “가족보다 경력이 중요한 만큼 결혼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지 않는다”고 답했다 한다.

그렇지만 냉정히 고려해 보면 콘트라 섹슈얼의 등장은 ‘무늬만’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1980년대 초부터 이미 경영대의 여학생 진입이 20%를 넘어섰던 미국의 성적표를 챙겨 보면 2000년 포천지 선정 500대 기업 가운데 여성 총수의 수는 3명에 불과했고, 2500명에 이르는 최고경영진 중에도 여성은 63명뿐이었으며, 소득순위 200위 안에 드는 최고경영자는 모두 남성이었다.

물론 최고위직 여성의 수가 희소한 이유는 파이프라인상의 문제이기에 지금 추세로 여성이 약진하면 대거 진입은 시간문제라는 낙관론도 있다. 특히 여성의 약진으로 말하면 우리네야 남부러울 것 없다. 지난해만 해도 사법시험 및 행정고시의 여성 합격자 비율이 각각 24.4%, 28.4%에 이르렀고, 각종 자격시험에서 여성이 수석 합격의 영광을 누려 매스미디어의 집중 조명을 받는 가운데 앞으론 성차별 대신 역차별이 문제가 되리라는 주장이 목소리를 높여 가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선 낙관을 경계하라는 목소리가 우세한 듯하다. 이제 20대 콘트라 섹슈얼이 주목해야 할 것은 장밋빛 청사진 이면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방식이 계속 정교해지고 세련돼 가고 있다는 점이다. 예전처럼 드러내 놓고 여성을 배제하고 막무가내로 여성을 비하하는 경우를 발견하긴 쉽지 않지만 ‘유리 천장’은 건재하고 ‘미묘한’ 혹은 ‘은밀한’ 차별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미묘하게, 은밀하게 작동하는 차별은 사규 같은 공식적 상황보다 대화나 일상적 에피소드 같은 비공식적 상황에서 빈번히 일어나기에 인식하기 쉽지 않고, 조직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에 효율적 대처 방안을 찾기는 더욱 쉽지 않다.

지금도 일을 결혼에 앞세우는 여성에겐 ‘남편은 여자하기 나름’이라며 결혼 압력이 줄기차게 가해지고, 자녀 대신 성공을 선택한 여성에겐 ‘이기적이며 냉혹하다’는 사회적 낙인이 덧붙는 게 우리 현실이다. 남성 중심의 조직문화 속에서 보란 듯 성공한 여성 다수는 남자보다 더 철저히 남성다움을 실현해 온 자신을 보며 ‘여성다움’을 폄훼한 데 대한 회한, ‘자신다움의 진정성’을 상실한 데 따른 소외를 경험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콘트라’란 어휘 속에 이미 여성 본연의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는 반항의 의미가 숨겨져 있는 한, 20대 여성들은 형식적 기회는 활짝 열린 듯하나 실질적 기회는 교묘하게 닫힌 현실 앞에서 아직은 좌절과 박탈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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