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명랑’…하얀늑대가 날 구해줄거야

  • 입력 2004년 8월 13일 17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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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창작집 ‘명랑’을 펴낸 천운영씨. 그녀는 “촉각과 후각을 중시한다. 음식을 포크로 누를 때의 느낌을 즐긴다. 어디 갔다 오거나 누굴 만나면 그때 맡았던 향기를 나중에 떠올리곤 한다”고 말했다. 현재 계간 ‘문학동네’에 장편 ‘잘 가라, 서커스’를 연재하고 있다. -박주일기자
두 번째 창작집 ‘명랑’을 펴낸 천운영씨. 그녀는 “촉각과 후각을 중시한다. 음식을 포크로 누를 때의 느낌을 즐긴다. 어디 갔다 오거나 누굴 만나면 그때 맡았던 향기를 나중에 떠올리곤 한다”고 말했다. 현재 계간 ‘문학동네’에 장편 ‘잘 가라, 서커스’를 연재하고 있다. -박주일기자
◇명랑/천운영 지음/277쪽 1만원 문학과지성사

신진 작가 천운영씨(33)가 글을 쓰기 시작하는 시각은 자정이다. 그녀가 캄캄한 적요 속에 써 온 근작들을 담은 두 번째 작품집의 제목은 ‘명랑’.

이 ‘명랑’은 구김 없이 해맑은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삶에 지친 이들이 몸의 통증마저 느낄 때 먹는 진통제 이름이다.

‘명랑’을 관류하는 테마는 죽음이다. 여기 실린 8편 모두 죽음과 살을 맞댄 캐릭터들을 다루고 있다.

“칼이 내 몸을 뚫고 들어오기 시작한다. … 칼자루는 둥글고 따뜻하다. 피는 배를 적시고 허벅지를 타고 발등으로 흘러내린다. 나는 구멍 난 육체를 보고 싶어진다.” (‘그림자 상자’ 중에서)

이 죽음들은 ‘구원 잃은 이들의 출구’처럼 보인다.

작가가 가장 애착을 갖고 있다는 작품 ‘늑대가 왔다’는 구정물 흐르는 얼굴, 땟국에 전 옷을 입고 다니는 소녀를 그리고 있다. 소녀는 또래들한테서 따돌림과 박대를 받을 때마다 소리친다.

“하얀 늑대가 날 구하러 와.”

그러나 그런 늑대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고 소녀는 거짓말이나 하는 ‘늑대 소녀’로 손가락질당한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것은 늑대가 그려진 퍼즐 조각들을 맞춰 보며 기쁜 환상에 젖었다가 차들이 달리는 도로로 몸을 던지는 것.

거기, 얼어 죽기 전에 성냥불을 켜 보며 환상 속에 최후의 행복을 맛봤던 ‘성냥팔이 소녀’의 얼굴이 보인다.

천운영이 죽음을 다루는 손길에는 에로티시즘이 배어 있다. 그녀는 캐릭터들의 몸을 묘사하고 다루는 데 거침이 없다. 그러나 그 에로티시즘은 쾌락과는 다른, 삶의 증거를 확인하는 방식으로서의 에로티시즘이다.

“그녀(명랑을 복용하는 할머니)의 발은 전족(纏足)을 한 것처럼 작고 위태롭다. 버선을 벗기면 아기처럼 보드랍고 작은 발이 숨겨져 있다. … 그녀가 버선을 벗고 발을 씻을 때면 그녀의 발에서는 달짝지근하면서도 비린 풋내가 풍기는 듯하다.” (‘명랑’ 중에서)

작가 스스로 자전적이라고 밝힌 작품 ‘모퉁이’에는 “동생이 태어나면 엄마를 잃어버릴지 모른다”며 다락에 쭈그리고 앉은 소녀가 나온다. 이 소녀의 엄마에 대한 집착은 작품 ‘세 번째 유방’에서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 젖꼭지에 대한 작가의 애착과 맞닿아 있다.

“푸른 정맥이 장미꽃처럼 보이는 너의 가슴. … 작지만 동그란 가슴선과 젤리처럼 야들야들한 살, 그리고 톡 볼그라진 젖꼭지.… 젖꽃판 가장자리에 난 자그마한 돌기를 넌 세 번째 유방이라고 불렀지.”

작가는 “살면서 차츰 ‘몸이 아프다’는 말이 사실은 ‘마음이 아프다’는 뜻임을 알게 됐다”며 “촉감이야말로, 무엇이든 어루만지고 쓰다듬어 보는 것이야말로 진정 세상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그녀는 ‘후각’을 믿는다고 했다. “냄새를 맡는다는 건 숨을 쉬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평론가 김동식씨는 천운영의 이번 작품집에는 ‘냄새’라는 단어가 모두 124번 쓰였다고 밝혔다. 그녀는 두 쪽에 한번 꼴로 갖은 ‘냄새’를 두루 맡아본 셈이다. 그만큼 호흡하면서. 들숨 한번에 죽음, 날숨 한번에 에로티시즘을 교차시키면서.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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