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농업-기술 발달과 함께 확산
감자 재배 확대로 면 제조 수월해져… 전화-자전거 보급도 ‘대중화’ 한몫
제빙기술-인공조미료 등장이후… ‘여름철 냉면’으로 본격 자리잡아
‘짝꿍’ 만두는 1980년대 이후 붐
“서관(西關)은 10월이라 한 자나 눈이 쌓였으니/…손님 대접 간곡하다/…/눌러 뽑은 냉면에 배추김치 푸르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쓴 시를 보면 ‘냉면’은 눈이 쌓였을 때 먹는 음식이다. 실제로 조선시대엔 “한겨울 아랫목에 이불을 쓰고 앉아 덜덜 떨면서 동치밋국에 말아 먹는 음식”이었다고 한다. 당시엔 귀한 음식이라 양반도 특별한 날에야 먹을 수 있었다. 냉면을 널리 먹을 수 있게 된 건 19세기 중후반 이후 농업과 기술이 발달한 결과다.
때문에 요즘은 냉면이 여름철에 더 인기지만, 애호가들은 여전히 겨울에 먹어야 제맛으로 친다. 최근 발간된 교양서 ‘냉면의 역사’(강명관 지음·푸른 역사)와 ‘다시 쓰는 한국 풍속’(김용갑 지음·어문학사)을 통해 냉면이 확산된 과정을 살펴봤다.
● 19세기 말 직장인 ‘최애’ 음식
김용갑 전남대 문화유산연구소 박사(문화재학)에 따르면 19세기 중반 감자 재배가 확대되면서 냉면 먹을 기회도 늘어났다. 냉면의 주재료인 메밀은 점성이 없어 국수로 뽑기 까다로웠는데, 감자녹말을 섞으면서 제조가 수월해졌다. 김 박사는 “감자녹말 이전에는 메밀가루에 녹두 녹말을 더해 국수로 만들었는데, 녹두 녹말은 귀한 재료여서 냉면 국수로 보급되기엔 무리가 있었다”고 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국내 외식업이 활성화되며 냉면도 널리 퍼졌다. ‘냉면의 역사’에 따르면 인천을 비롯한 개항장과 서울, 평양 등 주요 도시에선 빨리 만들어 간단히 한 끼 때울 수 있는 냉면이 ‘직장인의 음식’ 메뉴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특히 전화와 자전거의 보급이 가져온 ‘배달 음식’ 문화의 확산과도 직결된다. 도시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냉면 가게 매출의 상당 부분은 1884년 제물포에서 처음 등장한 자전거 배달 주문 덕이었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명예교수는 “당대 직장인들은 점심 때 전화로 냉면을 주문했고, 음식점들은 앞다퉈 전화를 개설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설명했다.
● 제빙 기술과 인공 조미료 등장
20세기 들어선 얼음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며 ‘여름철 냉면’이 대중화했다. 얼음을 한강 등에서 캐서 저장하거나 공장에서 생산하는 기술은 1910∼1930년대 빠르게 발달했다. 적은 노동력으로 더 많은 국수를 뽑을 수 있는 ‘철제 국수틀’도 보급됐다. 강 교수는 “100년 전인 1925년 냉면은 통상 한 그릇에 15전(100전=1원)에 팔렸다”며 “보통학교 교사의 급여가 40∼60원 하던 시절이니 서울과 평양 등에선 부담이 크지 않은 외식 메뉴였다”고 했다.
1908년 일본에서 개발된 인공 조미료 ‘아지노모토(味の素)’ 역시 여름 냉면을 확산시킨 요인으로 꼽힌다. 한여름에 굳이 동치미를 담글 필요 없이 손쉽게 감칠맛을 낼 수 있게 된 것. 아지노모토의 국내 광고를 분석한 논문에 따르면 1925년부터 약 15년간 동아일보에 아지노모토 광고는 총 90건이 실렸다. 이 중 18건(20%)에서 냉면이 삽화나 광고 카피로 등장했다. 1930년대 평양, 부산 등에선 아지노모토 소매상 모임까지 생길 정도로 조미료가 인기였다.
요즘은 흔히 냉면에 ‘만두’를 곁들여 먹는다. 하지만 이는 밀가루가 흔해진 1980년대 이후에 생긴 문화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다시 쓰는 한국 풍속’에 따르면 남한에선 1970년대까지도 강원과 경기를 제외하면 만두가 흔한 음식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 박사는 “1970년대 쌀 자급화를 이루고 나서야 밀가루가 외식이나 별식용으로도 확산하기 시작했다”며 “밀가루 반죽으로 빚는 고기만두는 1980년대 이후 한반도 중부 이남으로도 확산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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