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티크리트

  • 입력 2003년 12월 2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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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정복자, 자비와 관용의 군주. 십자군전쟁의 ‘이슬람 영웅’ 살라딘에게 붙여진 헌사다. 흔히 중세 서유럽의 기독교도가 이슬람교도를 정벌하기 위해 200년간 지루하게 벌인 살육전을 십자군전쟁으로 알고 있지만 전쟁엔 상대가 있는 법이다.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1세에 맞서 지하드(聖戰)를 선언한 살라딘은 기독교인이 점령했던 예루살렘을 탈환한 뒤 진정한 기사도라 할 만한 선정을 펼쳤다. 아낌없이 베푼 술탄이었기에 세상을 떠났을 때는 장례비용까지 빌려야 했다고 스탠리 레인 풀은 ‘살라딘’ 전기에서 소개했다. 그의 고향이 바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 티그리스 강변에 자리 잡은 티크리트다.

▷이라크인처럼 역사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민족도 흔치 않다. 십자군전쟁 이후 서구문명에, 외세의 ‘석유 정치’에 당해 왔다고 믿는 그들은 늘 아랍의 영광을 재현해 줄 지도자를 갈망했다. 1937년 티크리트의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사담 후세인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살라딘의 후예를 자처한 그는 미국과 벌인 ‘신(新) 십자군전쟁’에서 미국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의 수호자가 되겠다고 천명했다. 어린 날 계부의 구박 속에 공부하면서 아랍 민족주의에 깊이 빠지기까지 후세인에게 든든한 정치적 토양 역할을 한 곳도 티크리트였다. 집권 후 그는 호화 대통령궁이며 거대 사원, 군사적 요충 시설을 세움으로써 고향의 은혜에 보답했다.

▷이 같은 배경이 있어 티크리트인들의 심리는 독특하다. 어느 지역보다 끈끈한 유대감과 친족 관계로 뭉친 그들은 명예와 자존심, 그리고 그것이 상했을 때 복수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집권 바트당 요직부터 비밀경찰까지 후세인 정권의 최측근을 공급하며 든든한 지지기반 노릇을 해 온 티크리트인들이다. 큰길마다 ‘후세인은 존재한다’고 씌어 있을 만큼 아직도 추종세력이 만만찮다. 후세인은 이곳 어딘가에 은신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억만금을 줘도 티크리트 사람들은 그의 행방을 불지 않을 거다. “그것이 우리 아랍인의 전통”이라는 게 그들의 말이다.

▷이곳에서 무고한 우리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자신의 자랑스러운 전통과 명예가 남에게 아픔으로, 테러로 가해진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티크리트인들 역시 희생자인지도 모른다. 지역색을 정권유지 기반으로 이용한 권력자에게 아직도 농락당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천국의 가장 위대한 속성은 자비’라며 적국의 포로까지 사랑으로 감쌌던 살라딘이 후세인을, 복수심으로 가득 찬 티크리트인들을 본다면 뭐라고 할 것인가.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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