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서지문/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입력 2003년 10월 26일 18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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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가난한 유럽 유학생사회에서 언제 찾아가더라도 밥 한 끼를 잘 얻어먹을 수 있고 사상에 대해 금기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몇 집 중 하나가 송두율 박사의 집이었다고 한다. 동료 학생들에게 그런 환대를 베풀 수 있는 ‘활동비’와 ‘주체사상’ 중 어느 것이 더 송 박사로 하여금 북한에 다가가게 했을까? 그가 고안해낸 북한체제에 대한 ‘내재적 접근’법은 그가 북한에서 누린 높은 지위의 결과였을까, 원인이었을까? 그가 ‘사법처리’의 위험을 무릅쓰고 남한행이라는 필사적인 모험을 감행한 것은 그의 남은 생애를 적화통일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바치려는 북한에 대한 충성심에서였을까, 아니면 유럽에 남아서는 더 이상 북한에서 ‘활동비’를 받을 수 없게 된 속사정 때문일까?

▷송 박사 자신의 입국 동기나 속내, 그리고 그를 남한으로 보내고 불러들인 사람들의 계산이 무엇이었건 간에 그의 남한행은 그에게서 신비의 베일을 벗겨냈다. 국가정보원과 검찰의 소환 조사과정에서 그가 주저주저하면서 한 가지씩 시인했다가 번복하고 하면서 벌이는 수사당국과의 줄다리기, 그의 불명확한 말, 고정되지 못하는 시선, 그리고 사상적 입지 천명의 거부 등은 그가 지적인 엄격성과 대담성을 지닌 ‘경계인’이 아닌 기회주의자이며 스스로와 남에게 정직할 수 없는 ‘회색인’임을 명백히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를 영웅으로 숭배했던 순진한 추종자들에게는 쓰디쓴 환멸을, 그리고 그와 사상적 견해는 달라도 지식인다운 당당함을 기대했던 많은 지성인들에게는 민망함을 안겨주었다.

▷필자의 견해로는 송 박사를 남한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그에 대한 가장 가혹한 형벌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되면 자유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아 그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나고, 지식인들과의 사상 토론에서 그의 사상적 기반의 빈곤함이 여지없이 폭로되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주체사상 교화활동은 그에게 실망한 젊은이들로부터 냉대와 야유를 받을 것이다. 그가 거물급 사상가, 지적인 영웅 대신에 사상적 사기꾼으로 판명되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의 불가피한 자기 회오와 자기 불신이 지식인 송두율에게 내려질 수 있는 가장 큰 징벌이 아니겠는가.

▷그에 대한 사법처리는 우리 법률의 존엄성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유사한 케이스와의 형평에 어긋나지 않으면 될 것이다. 사법처리와 관계없이 그가 지금이라도 자신의 지적인 오류와 파산을 솔직히 시인한다면 인간 송두율에게는 아직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

서지문 객원논설위원·고려대 교수 jimoon@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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