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양기대/正道 vs 외압

  • 입력 2003년 10월 26일 17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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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1997년 5월 당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아들 현철(賢哲)씨 비리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던 어느 날, 심재륜(沈在淪) 중앙수사부장은 밤늦은 시간에 청와대 고위인사 K씨의 전화를 받았다.

K씨는 술에 취한 목소리로 “심 부장, 각하가 울고 있어요”라며 현철씨의 선처를 부탁했다. 현철씨를 구속하지 말라는 일종의 ‘읍소성’ 압력 전화였다.

그뿐만 아니었다. 당시 권력핵심부에선 정보기관 직원들을 동원해 심 중수부장을 미행하고 재산 및 사생활에 문제가 없는지를 뒤지는 등 약점을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검찰 내부에서도 권력 지향형의 일부 세력들은 원칙대로 수사하는 심 중수부장을 못마땅하게 여겨 기회만 있으면 흠집을 내려고 했다.

심 중수부장은 이런 난관을 극복하고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의 아들을 구속했다. 그리고 얼마 후 대구고검장으로 ‘좌천성 승진’을 했다. 그가 더 이상 사정의 칼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권력핵심부의 생각 때문이었다.

6년이 지난 사건을 길게 언급한 것은 요즘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SK비자금 사건’ 수사도 검찰로서는 결코 만만한 수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어떻게 보면 훨씬 어려운 수사다.

우선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최도술(崔導術) 전 대통령총무비서관이 SK비자금을 받아 대선 빚을 갚기 위해 썼다는 점에서 현직 대통령의 대선자금과 측근 비리 문제가 도마에 올라 있다.

또 사실상의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의 대선자금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지도 큰 관심거리다.

따라서 검찰이 ‘편파수사’를 하거나 수사 과정에서 작은 실수라도 하면 곧바로 권력측이나 정치권의 역공을 받기 십상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강금실(康錦實) 법무부장관이나 송광수(宋光洙) 검찰총장이 권력이나 정치권의 외풍을 막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점이다.

사실 검찰은 그동안 역대 정권의 정치자금에 대해 수사를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거나 미봉에 그쳤다. 검찰 수뇌부가 정권의 압력에 굴복하거나 정권의 입맛에 맞는 방향으로 수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검찰 수사에 대한 권력의 압력이 오죽했으면 전직 검찰 고위간부는 “검찰에 가장 필요한 것은 청와대와 맞설 만큼 기개 있는 검사를 키우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SK비자금 사건 수사팀이 노 대통령과 정치권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는 평가받을 만하다.

특히 이 사건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안대희(安大熙) 대검 중수부장이 사적인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강도 높게 수사를 진행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 중수부장은 노 대통령과 사법시험 동기로 이 정권 들어 그의 소망이었던 중수부장에 임명됐다. 그가 지난 정권에서 두 차례나 검사장 승진에 물을 먹은 것은 고교 선배인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전 총재측과 가깝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고 한다.

아무튼 요즘 그는 “항상 이 자리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일을 하고 있다”며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SK비자금 수사는 검찰이 수사의 정도를 걷는다면 고질적이고 망국적인 정경유착의 ‘검은 고리’를 끊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다.

정권이나 정치권이 이번에도 검찰에 압력을 가해 수사가 왜곡된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다.

양기대 사회1부 차장k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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