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유럽의 左派와 한국의 左派

  • 입력 2003년 10월 15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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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김철수 사건’이 오랜만에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 열띤 담론을 불러일으킨 듯하다. 거의 매일 일간지에 실린 그 많은 논의들을 훑어보고 나니 나까지 거기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 다만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독일현대사는 아직도 ‘테라 인코그니타(미지의 세계)’인가 싶은, 미심쩍은 얘기들이 눈에 띄어 약간 토를 달아 볼까 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도 관여하고 있다는 P교수는 송씨의 이념적 위상을 ‘독일 사회민주당 중도파 정도’라고 적고 있다. 북의 노동당에 가입한 사람을 독일 사민당의 중도파로 간주한다는 게 두 당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일까.

▼유럽선 ‘잘못된 공산주의’ 비판신랄▼

제2차 세계대전 후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에서 한반도의 38도선에 이르기까지 세력권을 확대한 소련이 그 지역을 소비에트화한 전략은 놀라울 정도로 동일했다. 먼저 극우세력을 고립시키기 위해 중도우파에서 좌파에 이르는 세력을 한 천막 안에 몰아 ‘민족전선’(독일의 ‘반파쇼민주정당통일전선’, 한국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고 그 다음에 이 세력을 이끌 중심축을 구축하기 위해 인기 없는 공산당과 대중적 인기가 있는 온건좌파 정당을 합쳐 새로운 간판 밑에서 공산당이 주도권을 잡는 수순이 곧 그것이다.

동독에서는 소련군 점령사령부의 강압에 따라 1946년 2월 공산당과 사민당이 ‘사회주의통일당’으로 합당해 집권당이 됐다. 그러나 똑같은 제의를 서독의 사민당은 단호히 거부한다. 반나치 저항운동으로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잃은 쿠르트 슈마허 서독 사민당수의 그 결정은 오늘날 ‘위대한 거부’라고 일컬어진다. 그 후 이오시프 스탈린의 베를린 봉쇄에 대항하고 니키타 흐루시초프의 베를린 중립화 위협에 저항해 서베를린의 자유를 수호한 로이터 시장, 브란트 시장은 모두 사민당 지도자였다.

독일과 달리 한반도에서는 북에서 공산당과 신민당이 북조선노동당으로 합당한 뒤 남에서도 1946년 11월 공산당 신민당 인민당이 합쳐 남조선노동당이 됐다. 남로당 북로당이 북한 인공 정권을 수립해 1950년 남침전쟁을 도발함으로써 그 이후 한반도에선 좌파라면 극좌파건 온건좌파건 초록은 동색이 돼버렸다. 이런 노동당에 입당한 사람을 독일 사민당의 중도파 정도로 볼 수 있을까.

송씨가 북한을 처음 방문한 73년만 해도 “독일과 서구 학계에서 당시 북한은 지속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는 나라로 평가받고 있었다”는 송씨의 말을 어느 신문은 인용했다. 그러나 그에 한 해 앞서 서독 신좌파의 기함(旗艦)이라 불리던 잡지 ‘쿠르스부흐’는 평양에 다녀온 두 젊은 학자가 북한 정권을 ‘권위주의·민족주의적 총통국가’라고 신랄하게 비판한 르포를 실었던 터였다.

한편 송씨의 권유로 입북했다가 탈북 전향한 것으로 알려진 O씨가 송씨에 대해 “독일에서 공산당 활동을 하다 나중엔 빌리 브란트를 키운 베너 같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술회한 기사도 눈에 띈다. 헤르베르트 베너의 얘기가 나온 김에 송씨에게 ‘전향각서’ 같은 것을 요구한다면 그건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되리라는 P교수의 말에 대해서도 한 가지 밝혀 둘 것이 있다.

베너가 1927년부터 공산당원이었던 것은 맞다. 그는 1940년 대 초 코민테른 집행부에서 활동하다 스웨덴에서 잡혀 전향하고 전후 사민당에 입당했다. 1950년 10월 15일 동독에서는 첫 인민의회 선거가 실시됐다. 공산당이 각본에 따라 의석을 배분한 뒤 찬반만 묻는 사이비 선거였다. 이때 서독 연방의회에서 여야 정당을 대표해 동독 정권의 기만성에 대해 불과 같은 단죄의 연설을 한 이가 바로 베너 의원이었다. 전향한 베너의 그러한 공산당 비판이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배치되는 것일까.

▼‘宋교수’문제 한국좌파의 대처는…▼

서유럽 좌파와 한국 좌파의 근본적인 차이는 저쪽에선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사이에 확연히 선을 긋고 있는 데 반해 이쪽에선 공산 신민 인민 3당 합당 이후 예나 지금이나 초록은 동색이라는 것, 저쪽에는 공산당과 싸우는 좌익이 있는데 이쪽에는 그런 좌익이 없다는 사실이다.

소련이 붕괴한 뒤에도 서유럽의 좌파가 건재한 것은 위르겐 하버마스도 지적한 것처럼 그들이 일찍부터 서방의 후기자본주의 체제뿐만 아니라 동유럽의 소비에트 전체주의 체제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좌파는…?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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