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칼럼]盧정권 앞날엔 ‘희망만 있다’

  • 입력 2003년 10월 1일 18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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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하기란 쉽다. 자살이 윤화(輪禍)에 의한 사망률을 앞섰다는 요즘 세상에 절망하기란 조금도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는 일이다. 신문에 글을 쓰자니 힘들어도 희망을 갖는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철학자 칸트는 ‘가장 해가 없는 자유’란 일반 독자를 상대로 ‘이성을 공적(公的)으로 사용하는 자유’라 말한 일이 있다. 이성(로고스)이란 그리스어는 언어(로고스)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말의 이치가 곧 이성이다. 글줄이랍시고 쓴다면서 남들이 하는 절망에 편승해 세태에 관한 감정의 넋두리만 늘어놓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민망스럽기만 하다. 희망을 배우자!

▼절망적 상황들 뒤집어 본다면…▼

이렇듯 기특하게 마음을 고쳐먹고 나니 과연 세상이 어둡지만은 않다. 오히려 모든 것은 좋아지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는 듯이 보인다. 예를 들어 보자.

대통령이 ‘반개혁적’이라고 비난하던 정당에서 마침내 탈당을 했다. ‘개혁’을 주장한 이상 그것이 최소한의 ‘이성’적 결단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양 김(金) 시절엔 ‘문민·국민’의 정부라 하면서도 온 세상에 소문이 돈 대통령 자식들의 비리를 정권 말기에 가서야 겨우 공론화했다. 새 정권이 들어서자 집권 초기부터 대통령 친인척의 비리가 공론화되고 있다. 권력의 부패 방지를 위한 한국 정치와 언론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가.

대한민국의 국민이나 관료들 앞에서는 언제나 찌푸린 표정만 짓던 ‘대통령님’이 평양의 ‘위원장’ 앞에서는 시종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는 걸 보고 많은 국민은 어리둥절했다. 더욱이 식량난으로 전 세계를 향해 구걸하고 있는 북녘에 다녀온 수행원들이 돌아와선 곰의 어느 부분 요리며 프랑스의 얼마짜리 포도주며 기막힌 대접을 받았다고 입맛을 다시는 걸 보고 적지 않은 국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새 정부가 들어서자 특검제가 도입되더니 정상회담에 앞서 남쪽에서 거액의 외화가 북에 송금되었다고 밝혀 놓았다. 그러니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싶어 뭔가 이제 비로소 막힌 이치가 뚫린 것도 같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가 아닌데(만일 ‘하나’라면 휴전선은 뭐고 남북 대화는 다 뭐란 말인가) 무슨 국제 경기 잔치판만 벌이면 ‘우리는 하나’라며 반(反)이성적인 구호가 전국에 떠들썩했다. 그런 판에 지난번 대구에서는 유니버시아드에 온 북의 ‘미녀’들이 길거리에 걸린 현수막의 ‘위원장’ 사진을 보고 기겁을 하며 비에 젖을세라 눈물로 거둬 모셔가는 장면이 TV로 생중계됐다. 그러한 그네들과 우리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남쪽에선 정부도 안 가르쳐 주었는데 북의 ‘미녀’들이 스스로 시위하며 가르쳐 줬다. 국운이 트이는 길조(吉兆)가 아니겠는가.

해외에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반독재 투쟁을 해 왔다고 공영 방송이 우상화해 온 재독학자가 실인즉 73년에 이미 노동당에 입당하고, 북의 여비를 받아 10여 차례나 방북했다고 스스로 털어놓았다. 이 또한 우상이 ‘탈신비화(脫神秘化)’되는 계기로서 이성의 진일보를 위한 희망을 갖게 해 주지 않는가….

희망을 배우는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나니 이렇듯 신문 지면이 밝은 뉴스 천지다. 나는 경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신문의 경제면은 거의 안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도 경기가 좋지 않다고들 야단이라 나 같은 문외한도 이따금 심상치 않은 경제 관련 톱기사엔 시선이 끌리곤 한다. 그래서 제법 유식한 경제 용어를 배우게도 된다. ‘경기가 저점에 도달했다’느니, ‘주가(株價)가 바닥을 쳤다’느니 하는 말들이다. 나는 그게 도시 부정적인 말인 줄로 알았으나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경기가 저점에 도달했다면 그건 앞으로 경기가 상승한다는 뜻이요, 주가가 바닥을 쳤다면 주가는 오를 것이란 희망적 기대가 그 말에 담겨 있는 모양이다.

▼바닥친 정치 더 나빠지기야 할까 ▼

경제는 몰라도 정치는 누구나 아는 걸로 돼 있어 나도 한마디 거든다면 아무래도 노 대통령의 정부는 그 인기가 저점에 접근한 듯하고 우리나라 정치는 바닥을 치고 있는 듯만 싶다. 그러니 더 이상 나빠질 수가 없다는 뜻에서 노 대통령 정권의 앞날엔 희망만 있다.

유럽의 비평가들은 최악이다 싶은 공연을 한 음악가에 대해 그의 앞날엔 좋아질 희망만 있다고 흔히 적는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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