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칼럼]‘대통령 책임제’ 언제까지?

  • 입력 2003년 10월 29일 18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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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을 전공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헌정 역사를 출발부터 구경해 온 동시대인으로서, 그리고 대통령선거 때만 되면 마음에 드는 후보는 없어도 유권자 구실을 다해 온 국민으로서 한마디쯤 하는 건 용납될 줄 믿는다.

취임 1년도 안돼 재신임을 묻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위기는 노무현이라는 특정인의 위기라기보다는 우리나라 대통령제도 자체의 위기를 들춰내주었다고 보아서 잘못일까.

▼실패 사례 누적…제도의 위기 ▼

앞으로 불세출의 영웅이 출현할 전쟁도 없을 것 같고(있어서도 안 되고) 민주화 투사가 등장할 독재도 없을 것 같은(있어서도 안 되는) 세상에 만민의 추앙을 받을 대통령‘감’이 개천에서 용 나듯 우리 유권자 앞에 나타나리라곤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선거에는 양반이 없다. 선거만 했다하면 초등학교 반장 선거도, 종교단체 내부의 선거도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짓거리엔 부족함이 없다. 정치가란 그런 선거를 치르고 나온 위인들로서 막말을 용서해주신다면 도의적으로는 거의 ‘키 재기 하는 도토리’들이다. 그 가운데서 국운을 5년이나 떠맡길 ‘제왕적’ 대통령을 뽑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거의 모험이요 도박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대통령책임제란 세 분의 대통령 밑에서 정부의 최고위직을 두루 맡아본 저명한 정치학자의 말에 따르면 그 실상은 ‘대통령무책임제’다.

나는 민주주의를 신봉한다(사르트르 식으로 표현한다면 ‘그보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는 것은 그러나 모든 선거를 믿는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인간주의자(휴머니스트)임을 자처한다. 그러나 나는 모든 인간을 믿지는 않는다.

히틀러는 박정희나 전두환처럼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게 아니라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 그렇대서 히틀러를 뽑은 독일 국민이 우리만 못한 바나나 공화국의 야만인도 아니요, 노 대통령을 뽑은 우리 국민이 독일인보다 월등히 문명개화한 민주시민이라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선거란 언제 어디서나 엉뚱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래서 모험이요 도박이라 한 것이다.

1년도 못 산 제2공화국의 간주곡을 무시한다면 우리나라는 지난 반세기 동안 줄곧 대통령(무)책임제의 헌정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은 쫓겨나고 총에 맞고 본인들이 혹은 자식들이 옥에 갇히고 해서 온 국민의 존경은 그만두고 ‘성한 사람’으로 그 자리를 물러나온 ‘전직’조차 없다.

반세기 역사에 단 한 사람의 성공한 대통령도 없고 실패 사례만 누적되어 왔다면, 그건 특정인이 아니라 대통령제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이쯤 해서 우리 모두 인정해야 되지 않을까. 장차 선거권 연령을 1, 2년 낮춘다면 18, 19세 유권자들이 앞으론 보다 신중하게 훌륭한 대통령을 뽑아줄 걸로 기대할 수 있을까.

안으로는 국민통합, 밖으로는 민족통일을 이룩함으로써 세계화 시대에 보다 높은 국제 경쟁력을 갖추는 일이 21세기의 국가목표다. 그러려면 분단국의 경우 아무래도 대통령제라야 된다는 주장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법 먹혀들었다.

그러나 내각책임제를 유지해 온 분단국 서독은 이미 10여년 전에 말짱하게 통일의 위업을 성취했는데 잘난 대통령책임제를 견지해 온 대한민국의 경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언제나 이뤄질 것인지….

민족통일에 신통력이 없는 것으로 입증된 대통령책임제는 국민통합을 위해선 도리어 적극적인 장해가 되어 왔음도 지난 50년의 역사가 명시해주고 있다. 역대 대통령은 지역주의 정치의 소산이자 그걸 확대재생산하는 새 동인(動因)이었다. 그것이 한국 현대사의 진실이다. 지역주의 타파를 갸륵하게 외치고 있는 노 대통령도 예외는 안 될 것이다.

▼代案 생각해야 할 때 아닐까 ▼

국민통합, 민족통일, 경제의 경쟁력 제고와 같은 힘든 과업을 수행하려면 아무래도 장기적인 정권의 안정은 필요하다. 그러나 임기와 재선 횟수가 제한된 대통령책임제하에서는 이를 위해 이승만, 박정희처럼 헌정중단의 개헌 쿠데타를 해야만 했다. 서독의 콘라트 아데나워나 헬무트 콜은 각각 14년, 16년씩이나 권좌에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합헌적 합법적인 장기 집권이었다.

대통령(무)책임제의 한계는 분명하다. 이젠 그에 대한 대안을 생각해봐야 할 때가 아닐까.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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