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민 칼럼]MJ의 '남는 장사'

  • 입력 2002년 12월 9일 18시 34분


어떤 경제학자는 자본가를 ‘입구에 들어서기 전에 출구의 위치부터 확인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등뒤로 문이 잠기는 곳은 어디에도 들어서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진 것을 지키려는 조심성이 후천적 속성으로 길러졌기 때문인가.

그런 점에서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자본가 출신 국민통합21의 정몽준(MJ) 대표와 민주당의 프로 정치가 노무현 후보간의 단일화가 난항일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두 사람은 ‘등뒤로 문이 잠긴’ 밀실회담 딱 한 번으로 단일화에 전격 합의하고 ‘러브 샷’을 이뤄냈다. 물론 ‘출구’를 나온 정 대표가 그 후 여론조사와 그 결과에 대한 승복 과정에서 몇 차례 심정변화를 일으키긴 했지만 두 정당은 마침내 선거 공조의 길에 들어서는 모양이다.

▼단일화 내주고 공동정부 얻어▼

MJ가 누구인가. 그는 재벌의 상징인 고 정주영씨의 아들로 수천억원짜리 회사를 (‘생각까지 대신해줄 정도’로 막강한 임원진과 함께) 물려받았지만 스스로는 별로 이룬 것 없이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지고도 오늘날 ‘노 후보가 당선되면 정부를 공동책임질 동반자’의 위치에 당당히 오른 것은 감탄할 일이다. 더구나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선하기 위해 2004년에 개헌한다’고 합의했던 두 사람이 어느새 정권 시작부터 5년간 국정운영을 함께 책임지기로 했다니 MJ는 전투에서 지고도 전쟁에서 이기는 놀라운 ‘상술’을 발휘한 셈이다.

국가운영에서 ‘공동 책임’이란 말은 당연히 국정 집행상 권력의 공유를 의미한다. 두 사람이 어느 분야에서 얼마만큼 권력을 나눠 가질지는 아직 모른다. 2원집정제의 형식이라면 두 사람간의 권력 분포는 ‘한시적으로 작은 지분을 동반자에게 나눠주는 데 그쳤던’ 김대중대통령 정권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정권이 이렇게 산술적으로 반분되는 상황은 노 후보에게 권력을 몰아주려는 지지자들 입장에선 김빠지는 일이기도 하다.

노 후보는 최근 유세에서 “나 보고 외교를 모른다고 하지만 세계를 잘 알고 많은 외교인맥을 가진 정 대표와 손을 잡았으니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외교 국방 남북문제는 한 줄기인데 MJ에게 외교를 맡기겠다는 것은 “남북대화만 성공하면 다 깽판 쳐도 괜찮다. 나머지는 대강해도 괜찮다”고 말할 정도로 남북문제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던 노 후보로서는 중대한 양보를 한 셈이다.

노 후보와 정 대표간의 권력분점이 ‘쌍두의 독수리’가 될지 ‘2인3각(二人三脚)’이 될지는 모른다. 쌍두체제일 경우 그동안 대북문제와 대미관계 그리고 경제분야에서 극명하게 대조적 입장에 있던 두 사람의 머리는 마주 본 채 서로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말할 수도 있다. 정치판처럼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무지개색처럼 변하며 춤을 추는 곳이라면 그들의 방언은 때에 따라 ‘통역’조차 불가능할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정권이 한목소리로 대외정책을 추진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만일 2인3각의 모습이 된다면, 숨가쁘게 변하는 세계화시대에서 과연 순발력 있고 일관성 있는 정책이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MJ는 단일화협상 전에 “나는 이념적으로 이회창 후보와 더 가까운 사람이다. 왜 노 후보와의 단일화만 얘기하는가”라며 노, 정간의 이념적 괴리를 인정한 적이 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노 후보의 성(城)에 ‘공동 성주(城主)’로 들어가게 되는지는 모른다. 물론 뭉치고 헤어지는 것은 본인의 자유다. 이념이나 노선이 다르다고 비판하지만 우리 정치사에서 정치인들이 그런 걸 따져가며 지조 있게 모이고 흩어진 적은 별로 없지 않은가.

▼정책추진 한목소리 가능한가▼

정치인들의 권력욕에는 질릴 만큼의 풍요라는 게 없다. 두 정당이 단합해서 정권을 잡는다 해도 양쪽 정치인들이 쉽게 욕망의 포만감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5년간 DJ 정권을 통해 보아왔다. 노 후보가 집권할 경우 과연 정 대표가 지금처럼 뛰어난 상술을 발휘해 ‘갑과 을의 관계’에서 계속 갑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군말을 없애려면 두 정당은 권력 나누기에 대해 지금쯤 미리 세부내용을 계약할 필요가 있다. 대선 결과에 따라 필요없는 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규민 논설위원 실장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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