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독거 어르신 밑반찬 배달 및 말벗 봉사.’ 신청을 하긴 했는데 막상 가려니 때아닌 긴장감이 밀려왔다. 일찌감치 지정된 장소에 도착해 근처 카페에 머물렀다. “옆에 차 대도 되나요?” 한 여자가 문 사이로 …
“앞으로의 계획은 뭔가요? 도배사 말고 또 다른 직업도 생각해본 적 있나요?” 최근 들어 수도 없이 받는 질문이다. 도배를 한 지 6년 차, 앞으로 그 기술을 활용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아니면 사회복지사에서 도배사가 되었듯이 전혀 다른 직업에 또다시 도전할지 궁금해하곤 한다. 사…
“남기실 말이 있습니까?” 부산 기장군 정관읍 부산추모공원 명패 접수처 건너편 중년 여성이 상냥하게 물었다. 6월 21일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부산에서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마치고 봉안함에 고인을 모신 뒤 최종 절차가 봉안당에 붙여둘 명패 접수였다. 고인의 성함과 생년월일과 사망…
남편과 해마다 한 번은 스쿠터 여행을 간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스쿠터 한 대를 며칠간 빌려 남편이 운전하고 나는 뒤에 타는 것이 고작이다. 차 대비 불편한 점이 많지만 해를 두고 잊지 않고 찾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차를 타고 보는 풍경이 3인칭 관찰자 시점쯤 된다면 스쿠터는 …
내가 스스로 좋아서 혹은 과제여서 어쩔 수 없이 책을 읽어야만 했던 학생 시절이 지난 이후부터, 거기다가 하루 종일 현장에서 도배를 하며 다른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된 이후부터는 더더욱 책을 비롯한 글 읽을 일이 없어졌다. 그 대신 간편하게 볼 수 있는 짧은 영상을 접하는 …
도쿄 시모키타자와는 5년 만에 가도 여전했다. 수수하고 느슨한 ‘시모키타자와풍’의 빈티지 옷 가게들이 역 앞부터 늘어서 있었다. 가게 앞에 벤치를 놓아둔 헌책방에서는 사람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헌책을 고르고, 책방 빈 곳에 대충 만들어둔 자리에서는 사장님이 끓이는 밀크티와 향냄새가 났다…
몇 해 전 세 번째 직장에 다니던 때였다. 변화와 성장에 목말라 있었지만 어떤 경력직 공고를 보아도 가슴이 뛰지 않았다. 비슷비슷한 업계, 비슷비슷한 직무로의 이직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막연한 다짐만 있을 뿐 달리 떠올릴 수 있는 선택지도 없었다. 당장 하루치 선택들에 매몰되어 시…
‘저는 시집 안 가요’라는 아가씨의 말, ‘본전도 안 남아요’라는 상인의 말, ‘이제 그만 죽어야지’라는 어르신의 말이 세상 3대 거짓말이라는 오랜 유머가 있다. 나는 여기에 ‘저희 집처럼 해드릴게요’라는 도배사의 거짓말을 하나 더 보태고 싶다. 소비자의 마음을 사기 위해 무턱대고 거…
지난 제네바 출장 중 갑자기 저녁 약속이 잡혔다. 당일 예약이 되는 레스토랑은 중심가의 유명 레스토랑 하나뿐이었다. 도착하니 빈자리도 많은데 영 불편해 보이는 구석 테이블이 우리 자리였다. 해외에서 업무를 보다 보면 별것 아닌 일에도 기분이 식을 때가 있다. 그때도 그랬다. 식당을 잘…
멋진 언니들을 롤 모델로 꿈을 키워왔다. 첫 롤 모델은 고등학교 학생회장 언니였다. 훤칠한 키에 공부도 잘하고 심지어 학생회장까지 하는 하이틴 드라마에서나 보던 ‘사기캐’였다. 두 번째 롤 모델은 첫 직장 선배였다. 타고난 패션 센스에 뭘 걸쳐도 태가 났고, 업무뿐 아니라 음악, 미술…
서로 바빠 통 연락 없이 지내던 친구가 도배를 부탁해 오는 일이 종종 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오랜만에 친구 얼굴도 볼 겸 도배 작업을 맡아 진행한다. 친구나 지인의 부탁을 받아 일을 하다 보면 단순히 도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조금은 더 들어가게 되는 경험을 한다. …
최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신간을 내며 북 토크를 하던 도중 이런 질문 겸 감사 인사를 받았다. ‘중학교 도서관 사서입니다. 먼저 반지수 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요즘 아이들이 정말 책을 읽지 않습니다. 글로 된 책은 더욱 읽기 힘들어합니다. 코로나와 쇼트폼 시대 이…
고된 해외 출장 귀국 길엔 멀리서 대한항공 연파란색 기체만 보여도 안심하곤 했다. ‘저거 타면 집에 간다’를 실감하는 것이다. 몇 년 전 유독 짐이 무겁던 출장, 이코노미 클래스 복도를 지나 정신없이 짐을 넣고 자리에 앉던 중 기내 스피커에서 나오던 이름 모를 경음악이 그날따라 좋았다…
“이번에 올 때 반찬통들 좀 가져와라.” 엄마는 매번 반찬통이 부족하다. 반찬 하나를 해도 딸들 세 집으로 가는데, 심지어 하나만 하시는 일도 없다. 각종 김치에 장조림, 진미채볶음, 콩자반까지 딸들을 만나는 날이면 엄마는 늘 전날 밤까지 부엌에서 분주하다. “엄마, 힘들게 뭘 또 이…
신축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도배를 하면 늘 마감 시한에 쫓기는 데다 현장 여건이나 다른 공정의 영향 때문에 애초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아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친다. 한 현장에 들어가면 평균 2, 3개월 정도 도배를 하는데, ‘이 현장이 마무리되면 다음 현장에 들어가기 전에 조금 쉬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