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폰이 고장 났다. 이후 첫 출근길, 택시를 타면서 습관적으로 귀에 꽂았다가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아차 싶었다. 다시 빼려다 순간, 손을 거두었다. 다년간의 탑승 경험에 기반한 찰나의 계산이었다. 30분 남짓한 이동 시간. 이어폰은 내가 당신의 소리를(배가 고프거나 아…
도배를 시작한 지 어느덧 만 4년,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도배 기술의 성장, 작업 결과에 대한 책임감의 변화, 팀에 속해 있다가 나만의 팀을 꾸리게 된 점 등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를 꼽는다면 일당을 받던 내가 이제는 일당을 주는 입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현재 팀원 3명…
신입사원 A가 출근을 하지 않았다. 처음엔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조금 기다리면 문이 벌컥 열리고 민망한 표정을 한 A가 뛰어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A는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오후 늦게 한 통의 e메일이 도착했다. ‘우리의 고객이 귀사를 퇴사하…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새벽 등굣길에 듣던 신해철의 ‘나에게 쓰는 편지’ 가사가 어느 정도 내 삶의 방향을 정했다. 가사는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의 의미를 묻고, ‘우리가 찾는 …
언젠가 ‘세상 사람들이 다 목걸이 매고 출퇴근하는 직장인인 줄 아냐’라는 비아냥을 들은 적 있다. 스스로가 ‘회사원’이다 보니 아무래도 출퇴근을 골자로 삶도 글도 전개될 수밖에 없는 탓이다. 속으로 항변한다. 어쩔 수 없다고. 그런 삶이 있듯 이런 삶도 있고, 고작 내가 모든 삶을 대…
신축 아파트 건설 현장은 아직 길이 닦여 있지 않고 군데군데 흙이 파헤쳐져 있어서 비라도 오면 길이 침수되거나 주변이 전부 진흙 밭이 되어 걷기 힘들 때가 많다. 통행로가 물에 잠기면 영락없이 신발은 물론이고 양말까지 완전히 젖어 축축하고 불편한 상태로 일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가끔…
에어컨이 고장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일주일 전쯤의 일이다. 몇 년간 잘 사용해온 에어컨에서 한두 방울씩 물방울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역시 수리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수리기사를 불렀다. 수리기사는 벽에 붙어있던 에어컨을 툭 떼어 보더니 …
“배터리 바꾸셔야 해요. 거의 끝났어요.” 자동차보험 긴급출동 서비스 사장님이 말했다. 한숨이 나왔다. 저번에도 방전되어 교체했는데. 나는 유럽의 대성당처럼 천천히 고치는 26년 된 가솔린 수동변속기 차를 갖고 있다. 차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운전 빈도가 낮고, 운전 빈도가 낮아 금방…
학창 시절 나의 장래 희망은 ‘선생님’이었다. 공부를 제법 했고 친구들이 모르는 문제를 물어오면 설명해 주고 이해시키는 일련의 과정이 어린 마음에도 보람찼다. 물론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한몫했다.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교사만큼 좋은 직업이 없다’ 말했고 ‘특히 여…
나는 종종 강의 요청을 받아 지금의 직업을 선택하게 된 과정과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최근에는 직업에 대해 탐색하고 고민해야 하는 시기인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에게 강의할 기회가 많았다. 그런데 학생들은 때론 도배사라는 직업을 택한 과정이나 도배사로서의 경험보다…
다른 나라의 잡지를 보는 건 잡지인인 내 일상의 일부이자 즐거운 취미다. 그중에서도 일본 패션잡지 ‘뽀빠이’ 7월호는 나오기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잡지는 매달 큰 특집이 있다. 이번 호는 서울 특집이었다. 한국 서점에 나오자마자 펼쳐 보았다. 나는 2023년 7월호 ‘뽀빠이…
얼마 전 ‘공유 별장’ 사업을 하는 스타트업을 만났다. “그런데 ‘공유’라는 개념과 ‘별장’이라는 개념이 공존할 수 있나요?” 별장이라는 건 모름지기 숙박업소와 달리 내 취향, 내 흔적을 더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지 않냐는 취지였다. 사진을 보자 더 이상의 증명은 불필요했다. 애초부…
도배는 하나의 공간을 만드는 데 필요한 수많은 공정 중 하나로, 내 손길을 거쳐 누군가 살아갈 공간이 만들어진다. 신축 아파트 현장에서 똑같은 구조의 집을 끝없이 반복해 도배하다 보면 각각의 집들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내가 벽지를 붙여야 하는 빈 공간 그 이…
2023년 상반기 트렌드 중 판다가 있다. 2020년 경기 용인 에버랜드에서 태어난 아기 판다 ‘푸바오’와 그 부모 판다인 ‘러바오’와 ‘아이바오’의 인기는 여느 아이돌 그룹 부럽지 않다. 5월 마지막 주에는 일평균 7000명이 판다를 보러 에버랜드까지 왔다고 한다. 요즘 대중적 인기…
사진을 잘 찍히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촬영 현장이라는 건 경험 없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환경이다. 카메라 앞에서 좋은 표정을 짓기도 쉽지 않다. 좋은 사진을 만드는 건 현장에서 촬영을 진행하는 에디터의 부담이자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했다. 지난 직업 경험상 확신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