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쓰는 편지[2030세상/박찬용]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9월 4일 23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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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용 ‘아레나 옴므 플러스’ 피처 디렉터
박찬용 ‘아레나 옴므 플러스’ 피처 디렉터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새벽 등굣길에 듣던 신해철의 ‘나에게 쓰는 편지’ 가사가 어느 정도 내 삶의 방향을 정했다. 가사는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의 의미를 묻고, ‘우리가 찾는 소중함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라고 말했다. CD로 그 노래를 듣고 청소년답게 다짐했다. 지금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어른이 되어도 잊지 않겠다고.

어른이 되어 보니 ‘나에게 쓰는 편지’ 가사는 예언이었다. 우리는 ‘고흐의 불꽃 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아닌 각자의 현실을 생각한다. 미혼인 나는 결혼과 자립을, 결혼한 친구들은 자식의 교육과 앞으로의 수입을, 성공한 친구들은 더 큰 성공을 생각한다. 아직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친구들의 생각은 알 수 없어진다. 그런 친구들과는 슬슬 연락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소중하던 관계가 이미 깨졌음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의 씁쓸함도 어른의 맛이었다.

무슨 맛을 느끼든 삶은 계속된다. 우리는 직함을 달고 직무를 어깨에 멘 채 각자 자리로 출근해 그날의 임무를 수행한다. 과장님이나 차장님이나 수석님, 아니면 어딘가의 사장님이 되어, 집에 오면 아빠가 되어. 그 사이에서 나는 에디터라는 직함을 달고 지면을 만드는 직무를 하며 살게 됐다. 갈 길이 멀지만 흥미로운 일들도 생긴다. 최근에는 작사를 했다. 알고 지내던 음악인이 노랫말을 의뢰했다. 한국어 노랫말과 함께 살아온 입장에서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듣는 사람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고 위로의 메시지도 담고 싶지만 신파는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음악인은 초보 작사가인 내게 이렇게 의뢰했다. 글로 정리하니 앞뒤가 안 맞아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바로 이해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니까. 종종 돌아보기도 하고 가끔 격려도 듣고 싶지만, 신파는 내키지 않았다. 이 코너의 제목이기도 한 ‘2030’이 그럴 나이 같기도 하다. 이 연령대는 어른인가, 아닌가? 앞을 봐야 하나, 지난 삶을 복기해야 하나? 스스로를 다그쳐야 하나, 달래줘야 하나? 답이 있을 리 없다. 하루치의 최선을 다할 뿐이다.

신해철의 노래를 듣던 어릴 때의 나는 게으르고 염세적이고 몽상적이었다. 성실하고 진취적이고 현실적인 사람들을 보면 묘한 거부감도 들었다. 나이가 들며 세상이 알려주었다. 염세는 광의의 남 탓이고 몽상은 광의의 회피다. 남 탓과 회피 역시 젊음의 특권이지만 언제까지나 젊을 수는 없다. 그 사실을 몸으로 깨닫고 나서부터 뭐라도 하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남들에게 긍정적인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열정과 긍정이 좋다기보다는, 다른 수가 없다는 걸 알 뿐이다.

‘나에게 쓰는 편지’를 잊지 않았다. 종종 ‘우리가 찾는 소중함은 항상 변하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이라는 노랫말을 듣는다. 그런 마음으로 오랜 친구들을 떠올리며 가사를 썼다. 우리가 꾸던 꿈이 허술했어도 틀린 건 아니었다고. 지금 견디는 하루하루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거라고. 요즘 내 주변에는 힘겨운 시기를 보내는 친구들이 있다. 그 친구들에게 이 원고나 곧 나올 노래가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박찬용 ‘아레나 옴므 플러스’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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