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세상/전새벽]당신의 퇴사를 대행해드립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9월 11일 23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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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새벽 에세이 ‘닿고 싶다는 말’ 저자
전새벽 에세이 ‘닿고 싶다는 말’ 저자
신입사원 A가 출근을 하지 않았다. 처음엔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조금 기다리면 문이 벌컥 열리고 민망한 표정을 한 A가 뛰어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A는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오후 늦게 한 통의 e메일이 도착했다.

‘우리의 고객이 귀사를 퇴사하고 싶어합니다.’

자세히 읽어 보니 퇴사를 대행해주는 곳에서 보내온 모양이었다. 세상에 이런 대행사가? 통화를 시도했지만 A는 받지 않았고 대신 모르는 사람이 회사로 전화를 걸어왔다. 부디 고객에게 직접 연락하지 마시고 자신들을 통해 달라는 거였다. 결국 A는 한 번도 회사에 찾아오지 않고 퇴사했고, A가 쓰던 노트북은 대행사에 의해 반납되었다.

최근 우리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서울 본사가 아니라 도쿄 지점에서 일어난 일이긴 한데, 어쨌거나 놀라운 이야기라 만나는 지인마다 들려주게 됐다. 다들 퇴사 대행사의 존재를 신기해하면서도 A에 대한 비난을 덧붙였다. 어떻게 얼굴 한 번을 안 보고 가? 예의 없게. 나는 이 대목에서 석연치 않은 점을 느꼈다. 이건 정말 예의가 없어서 벌어진 일일까? 달리 생각해 볼 부분은 없는 걸까?

‘신뢰의 진화’라는 게임이 있다. 상대방(컴퓨터)과 협력할 것인지 배신할 것인지를 선택해 가며 돈을 모으는 게임이다. 배신을 선택하면 처음엔 컴퓨터보다 잘 벌 수 있다. 그러나 반복되면 컴퓨터도 배신을 고르기 시작해 결국 빈털터리가 되는 씁쓸한 결말을 맞는다. 반면에 협력하면 자산을 남기며 게임을 끝낼 수 있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신뢰가 필요하고, 신뢰는 협력을 통해 생긴다는 걸 알려주는 일종의 교육 프로그램인 셈이다.

A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나는 이 게임을 떠올렸다. 돌이켜보면 퇴사했던 동료 중에 좋은 말 들었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배신하는 거냐, 무책임하다, 다른 데 간다고 뭐가 다를 것 같냐 등 별의별 얘기들을 다 들었다고 하는데 하나같이 존중이 부족한 말들이었다. 아마 A도 비슷한 얘기를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니 A에게 회사에 대한 신뢰가 있을 리 없다. 회사에 대면으로 보고해봐야 내 결정을 존중하고 응원해 줄 것이란 신뢰 말이다. 나는 A 사건의 원인이 ‘예의 없음’이 아닌 ‘신뢰 없음’이라고 결론 지었다.

원인을 살펴봤으니 그로 인한 결과도 살펴보자. 퇴사 대행이 회사에 미치는 영향 중 하나는 이것이다. ‘더 좋은 일터를 만들고 싶다면 반드시 퇴직자를 인터뷰하라’고 글로벌 기업들은 입을 모아 강조한다. 떠나는 사람의 마지막 말에 분명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이다. 한데 대행사가 연락해 온다면 인터뷰를 할 수가 없다. 회사로서는 무엇을 개선해야 할지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셈이다.

인구 감소로 인해 채용시장이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한다. 기업끼리 인재 모셔가기 경쟁을 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이 경쟁에서 이길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라면 한번 퇴사하기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퇴직자 응대법이 잘 갖춰진 회사, 비난이나 회유가 아닌 존중과 응원을 보내는 회사, 그래서 퇴사 대행이 필요하지 않은 회사, 신뢰를 기반으로 마지막 인터뷰가 잘 이루어지는 회사, 덕분에 항상 개선되는 회사…. 인재는 그런 회사로 간다.


전새벽 에세이 ‘닿고 싶다는 말’ 저자
#퇴사 대행사#신뢰의 진화#인구 감소#채용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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