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으면 안 덥다는 거짓말[2030세상/이묵돌]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8월 14일 23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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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묵돌 소설가
이묵돌 소설가
에어컨이 고장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일주일 전쯤의 일이다. 몇 년간 잘 사용해온 에어컨에서 한두 방울씩 물방울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역시 수리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수리기사를 불렀다. 수리기사는 벽에 붙어있던 에어컨을 툭 떼어 보더니 “이건 수리가 안 되겠는데요”라고 말했다. 듣자하니 배관과 에어컨 호스를 연결하는 부품이 파손됐는데, 더는 공장에서 생산하지 않는 부품이라 수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또 앞으로 에어컨을 틀면 안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몹시 당황해서 말했다. 이 날씨에 에어컨을 틀지 말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글로 밥을 벌어먹는 처지라 주로 집에서 일을 하는데, 에어컨이 없으면 글을 못 쓴다. 글을 못 쓰면 굶어죽는 수밖에 없다. 수리기사의 답변은 단호했다. 에어컨을 계속 쓰고 싶으면 새로 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입금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인세를 털어 새 에어컨을 사야 했다.

새 에어컨이 들어오는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에어컨 설치를 위해 찾아온 기사님은 매립배관이 휘어져 있어서 교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더워 죽겠는데 매립배관은 또 뭐란 말인가. 기껏 산 에어컨은 반품됐고, 나는 전국에 몇 곳 있지도 않은 매립배관 수리 전문 업체를 수소문한 끝에 겨우 에어컨을 교체할 수 있었다.

낮 기온이 35도에 육박하는 한여름. 에어컨 없는 나날을 보낸 나는 온몸으로 기후변화를 받아들였다. 지구가 따뜻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펄펄 끓고 있다고 말하는 전문가들의 말도 이제는 납득이 간다. 이렇게 뜨거운 행성이 정상일 리 없다.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됐다. 에어컨 밑에서 ‘기후변화 같은 건 별것 아니’라고 말하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가. 미래세대와 지구를 위해 가급적 에어컨을 켜지 말라는 이야기도 많다. 나 역시 며칠 동안 더위를 먹어서 일도 못 하고, 잠도 못 자고, 온몸에 땀띠가 번져 고통받고 보니 알겠다. 이럴 때일수록 더더욱 에어컨이 절실하다는 것을.

환경운동가들은 뜨거운 지구를 위해 에어컨을 쓰지 말자고 한다. 하지만, 애초에 지구가 이만큼 뜨겁지 않았다면 에어컨 같은 것도 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지구가 먼저 시작한 싸움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거듭해서 상처를 주는, 연애 초기 귀찮은 애인과의 다툼 같다. 사람들이 기후변화와 같은 큰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은, 나중을 생각하지 못할 만큼 미련하거나 사악해서가 아니다. 나 역시 지구를 망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남태평양의 가라앉는 섬과 인류의 멸망도 자주 걱정한다. 단지 이 뜨거움을 견딜 만큼 강하지 않은 것이다. 나약한 것이다.

나약함은 으레 무시되는 인간의 특성이다. 폭염 속 에어컨 없는 야영에 지쳐 쓰러진 잼버리 대원들과, 그 대원들 더러 ‘귀하게 자라 불평이 많다’는 한 지자체 의원의 말에 나는 나약함을 느낀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강해져야 한단 말인가. ‘문 열고 가만히 있으면 안 덥다’는 거짓말이다. 대체로는, 에어컨 앞에 가야 안 덥다.


이묵돌 소설가
#가만히 있으면 안 덥다#거짓말#2030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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