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교수의 뇌의 신비]언어중추 고립때 ‘초피질 실어증’

  • 입력 2002년 12월 1일 18시 45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요정 에코는 제우스신이 바람 피우는 것을 도왔다는 이유로 헤라 여신에게 벌을 받는다. 그때부터 그녀는 스스로 말을 못하고 남의 말을 받아 따라 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런데 뇌중풍 환자 가운데에도 이런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왼쪽 뇌에는 언어중추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말 그대로 배운 말의 저장소다. 이 부분이 뇌중풍 같은 병으로 손상되면 제대로 말을 못하거나 못 알아듣게 된다. 이런 증세를 실어증이라고 한다.

사람의 입이 앞쪽에 있고 귀가 뒤쪽에 있듯이 언어중추 안에서도 말을 하는 기능은 앞쪽에, 말을 알아듣는 기능은 뒤쪽에 있다.

따라서 언어중추의 앞쪽이 손상되면 환자는 남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으나 스스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하고 물으면 대답은 해야겠는데 말이 나오지 않으니 끙끙거리며 애를 쓰게 된다. 그러나 “손 들어 보세요”하면 얼른 손을 든다.

반대로 언어중추의 뒤쪽에 손상이 생기면 말을 할 수는 있으나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 중얼중얼 자기 말은 유창하게 하지만 “손 들어 보세요”하면 무슨 소린지 몰라 눈만 멀뚱거린다.

언어중추가 앞뒤 모두 손상되면 말을 하지도, 남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게 된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 언어중추가 손상되지 않았지만 그 주변 조직이 모두 손상되어 언어중추가 다른 뇌 부위와 연결되지 못하고 고립 상태에 빠지는 수가 있다.

이런 환자들은 말을 제대로 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따라 말하기는 놀랄 만큼 잘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따라 말해 보라고 한 후 “내 이름은 ○○○입니다”하면 자신도 “내 이름은 ○○○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는 전혀 말을 하지 못한다. 이런 실어증을 ‘초피질 실어증’이라고 한다.

간혹 이런 환자들은 남의 말이 들리는 그대로 따라 하기도 한다. 즉 “오늘 기분이 어떠세요”하고 물어보면 자신도 “오늘 기분이 어떠세요”라고 마치 메아리처럼 따라 말한다.

가엾은 요정 에코는 잘생긴 나르시스를 쫓아가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못하고 그의 말 끝을 받아 따라 말할 수밖에 없다. 에코는 결국 상사병으로 죽고 말지만 초피질 실어증 환자들은 그녀만큼 불행하지는 않다. 이런 종류의 실어증은 대개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기 때문이다.

김종성 울산대 의대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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