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방형남/유럽이 몰려온다

  • 입력 2001년 4월 1일 18시 52분


지난해 서울 주재 유럽 외교관들은 “북한과 수교하려는 유럽 국가들이 줄을 서고 있다”는 말을 곧잘 했다. 한 유럽 국가의 대사는 “미국이 북한과 관계 개선을 하면 많은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즉각 뒤를 이어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친절하게 배경을 설명해줬다.

유럽 외교관들은 헛소문을 전한 것이 아니었다. 지난해 10월 조명록(趙明祿)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의 워싱턴 방문에 이어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부장관의 평양방문으로 북―미 사이의 긴장이 크게 완화되자 EU 회원국들은 기다렸다는 듯 줄줄이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영국(지난해 10월20일) 네덜란드(올 1월15일) 벨기에(1월23일) 독일(1월24일) 스페인(2월7일)…. 그 결과 EU 15개 회원국 가운데 북한과 수교하지 않은 나라는 프랑스와 아일랜드 단 2개국뿐이다.

유럽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있다. 5월이 가기 전에 EU 의장국인 스웨덴의 외란 페르손 총리와 EU의 외무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하비에르 솔라나 대외정책담당 대표, 크리스 패튼 외교담당 집행위원이 평양을 방문한다. EU는 회원국이 6개월씩 돌아가며 의장국을 맡아 주요 정책을 주도하는 형태로 운영되기 때문에 페르손 총리의 방문은 스웨덴 한 나라 총리의 방문이 아니라 EU 15개국의 방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서방 정상 가운데 처음인 페르손 총리의 북한 방문은 그래서 한반도에 상당한 변화를 초래할 수도 있는 중대한 발걸음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의미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 같다. 북한과의 관계, 미국과의 관계에만 정신이 팔려 또 하나의 중요한 변수인 유럽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 힘을 쏟지 않는 것 같다.

반면 미국에서는 “유럽이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사이가 벌어진 미국과 북한의 틈새를 메우려 한다” “부시 대통령의 강경 외교를 우려하는 유럽이 독자적 한반도 외교에 나섰다”는 등의 걱정이 나오고 정부와 언론은 이에 대해 설전을 벌이고 있다.

유럽은 북한의 ‘적국’이 아니며 외교 관계를 수립한 ‘우방국’이다. 북한과 유럽은 이미 무엇이든 논의할 수 있는 파트너가 됐다. 유럽은 북한과의 수교 과정에서 외교관과 언론인의 북한내 자유로운 활동, 원조사업 진행상황 감독 등의 약속을 얻어냈고 북한의 인권문제나 군비축소 등 까다로운 문제도 논의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미사일과 핵 등 덩치가 큰 문제에 막혀 꼼짝 못하고 있는 반면 유럽은 북한을 국제사회의 완전한 동반자로 인정하기 위해 작더라도 필요한 장벽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적극적인 대북 접촉은 우리에게는 기회인 동시에 도전이다.

조선시대 말기 많은 유럽국들이 한반도를 갈라먹기 위한 싸움에 뛰어들었던 역사를 되돌아보자.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은 일본이 주도하는 싸움판에서 금광채굴권, 철도부설권 등의 이권을 챙겼다.

시대와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100년 전 역사가 되풀이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한반도의 운명을 주도하려면 관련국들의 행보를 면밀히 분석하고 필요한 대비를 해야 한다. 유럽이 바로 그런 대상으로 부상하고 있다.

방형남<국제부장>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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