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황호택/'유리알' 통신

  • 입력 2000년 9월 15일 18시 54분


신형 휴대전화에는 최근 발신 전화번호가 20여개씩 저장되는 것들이 있다. 여러 모로 편리한 기능이지만 이 때문에 혼쭐난 남편들이 더러 있다. 남편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내는 직감으로 남편 행동의 이상을 발견했다. 시간을 확인했다. 아내는 잠든 남편의 휴대전화를 꺼내 최근 발신 전화번호를 뒤져 그 시간대에 통화한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남편이 숨겨놓은 여자가 나타났다.

▷부호분할다중접속(CDMA)방식의 휴대전화는 도청 감청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도청 감청이 두려운 사람들 중에는 책상 전화를 놓아두고 휴대전화를 쓰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도 안심해서는 안된다. 통화내용은 들을 수 없더라도 상대방 전화번호와 통화시간, 음성사서함 내용은 알아낼 수 있다. 휴대전화 거는 위치 파악도 가능하다. E메일은 다이아몬드처럼 영원하다는 말이 있다. 케네스 스타 검사가 르윈스키와 클린턴의 밀애를 세세하게 밝혀낸 것은 르윈스키가 친구에게 보낸 E메일 때문이었다. 발신자가 컴퓨터를 완벽하게 지우더라도 서버 컴퓨터와 수신자 컴퓨터에 내용이 남는다.

▷올초 미국 위성통신 감청망 에셜론이 유럽 기업의 산업정보를 도청한 것으로 드러나 세계가 깜짝 놀랐다. 유럽의회에 제출된 보고서에 따르면 에셜론은 전화통화와 팩스 E메일 등을 시간당 최고 수십억건씩 도청했다. 이렇게 얻은 정보를 유럽 기업과 입찰경쟁을 벌이는 미국기업이나 통상 협상에 나선 관료들에게 제공했다. 군사첩보 수집용이 산업스파이로 변질된 것이다. 군사 전문가들에 따르면 위성을 활용하면 전화를 이용하지 않은 실내 대화도 도청이 가능하다고 한다.

▷정보통신부는 통신서비스에 대한 수사기관의 감청건수가 70%이상 증가했다고 밝혔다. 정보통신 수단을 활용하는 범죄가 늘어나는 데 비례해 수사기관의 감청 건수가 증가하는 현상이 이상할 것은 없다. 인터넷 음란물이나 고소 고발사건을 수사하면서 사전 또는 사후 영장을 발부받아 감청하는 것은 정당한 수사활동이다. 그러나 ‘영장 없는 도청’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어쨌든 누가 내 은밀한 사생활을 유리알처럼 들여다본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황호택논설위원>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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