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월드컵 무대는… 43년 전 코피 흘리며 4강 오른 그곳”

  • 동아일보

[토요기획] 1983년 세계청소년축구 4강 주역 신연호
해발 2600m 멕시코 고지대서 혈투
조직력과 투혼으로 ‘원조 4강 신화’
올해 월드컵 대표팀과 겹치는 지역도
조기 입국-현지 적응이 성패 갈라

교정에서 축구 공을 들고 있는 신연호 고려대 축구부 감독. 고려대 제공
교정에서 축구 공을 들고 있는 신연호 고려대 축구부 감독. 고려대 제공
“지금도 생생하다. 처음 운동장에 들어갔는데 공이 어떻게 오는지 모르겠더라. 튀어 오르는 공을 잡으려다 보면 훌쩍 넘어가 버리고, 이 정도면 컨트롤이 되겠지 싶었던 공도 옆으로 휙 지나갔다. 그런데다 뛰는데 이유 없이 코피가 났다.”

19세 청년 신연호(62·고려대 감독)가 43년 전 처음 밟은 곳은 한국 축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무대였다. 해발 2600m에 가까운 멕시코 고지대. 백두산 높이와 맞먹는 곳이었다. 숨 쉬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무더운 날씨, 정오의 태양, 접시처럼 움푹 들어간 경기장을 가득 채운 7만 관중의 함성까지. 잊을 수 없는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U-20)축구선수권대회다.

“전진해서 공격을 한 번 하고 나면 수비할 생각이 안 들 정도였다. 진짜 숨이 안 쉬어졌다.”

공기가 희박한 고지대에서는 평소처럼 뛰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산소 포화도는 떨어지고, 심장은 더 빨리 뛴다. 하지만 당시 대표팀은 몸과 정신으로 버텨냈다. 첫 경기에서 스코틀랜드에 0-2로 패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멕시코를 2-1로 꺾고, 호주까지 연파하며 조별리그를 통과했다. 기세는 8강까지 이어졌다. 우루과이를 2-1로 누르며 4강 진출. 한국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대회 4강 무대를 밟는 순간이었다.

4강 상대는 브라질. 훗날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한 베베토와 둥가, 조르징요가 있었다. 한국은 선제골을 넣으며 앞서갔지만 결국 1-2로 역전패했다. 3, 4위전에서도 폴란드에 1-2로 졌다. 최종 성적은 4위. 그러나 이 대회는 ‘순위’ 이상의 의미를 남겼다.

1983년 6월 12일 멕시코 몬테레이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우루과이전에서 한국의 신연호(왼쪽)가 선제골을 넣고 있다. 동아일보 DB
1983년 6월 12일 멕시코 몬테레이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우루과이전에서 한국의 신연호(왼쪽)가 선제골을 넣고 있다. 동아일보 DB
신연호는 이 대회에서 멕시코전 역전 결승골, 우루과이전 선제골과 결승골을 터뜨리며 세계 언론으로부터 ‘작은 펠레’라는 찬사를 받았다. 한국 축구가 처음으로 세계 무대에서 “통한다”는 확신을 얻었다. 4강전이 열리던 날, 길거리는 조용했다. 상점들이 문을 닫았고 학교에선 수업을 멈춘 채 교사와 학생들이 TV 앞에 모이거나 라디오를 들었다. 선수단 귀국 당시 김포공항에서 서울 시내까지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2002년 한·일 월드컵보다 19년 앞선 ‘원조 4강 신화’였다.

● 왜 지금, 다시 멕시코?

43년 전 멕시코 청소년대회가 소환된 이유는 2026 북중미 월드컵(6월 11일∼7월 19일) 때문이다. 한국은 조별리그 1·2차전을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치른다. 해발 1550m 지대다. 3차전이 열리는 몬테레이는 540m지만, 이미 두 경기를 고지대에서 치른 뒤다. 해발 1500m를 넘으면 산소 흡수 능력은 약 5% 떨어진다. 회복 속도는 늦어지고, 공의 궤적도 달라진다. 공기 밀도가 낮아 공은 더 빠르고 멀리 날아간다. 혈관이 확장돼 코피가 나는 경우도 잦다.

1983년 대표팀은 톨루카(2660m), 멕시코시티(2200m)에서 훈련과 경기를 치렀고, 8강·4강·3, 4위전은 몬테레이와 과달라하라에서 소화했다. 일정 역시 6월 초부터 중순까지로 2026년 월드컵 일정과 유사했다. 그래서 신연호 감독의 경험은 지금 대표팀에도 시사점이 크다.

● 마스크 훈련과 6가지 전술… ‘호랑이’의 준비

당시 사령탑은 ‘호랑이’ 박종환 감독이었다. 여건은 열악했다. 고지대 전지훈련은 꿈도 꾸지 못했다. 대신 택한 방법이 마스크 훈련이었다. 1982년 12월부터 서울 효창운동장 인근 여관에서 합숙하며 마스크를 쓰고 달리게 했다.

“처음엔 10분도 못 버텼다. 점점 강도를 높여 30분까지 뛰게 했다. 지옥 훈련이었다.”

박 감독은 생전 이렇게 회상했다. 실업팀, 대학팀과의 연습경기에서 실점하면 그 수의 10배만큼 운동장을 돌게 했다. 태릉선수촌에서도 고강도 훈련은 이어졌다. 신 감독은 “몰래 마스크를 살짝 내리기도 했다”며 웃었다.

전술 준비도 치밀했다. 박 감독은 경기 상황을 6가지로 나눠 약속된 패턴을 만들고 번호를 붙였다. 1번부터 6번까지. 벤치 지시가 없어도 선수들이 상황에 맞춰 번호를 선택해 움직였다. 이 ‘기계 같은 조직력’이 본선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 신의 한 수, 조기 출국과 김치찌개

대표팀은 대회 보름 전 멕시코에 입국했다. 나름 대한축구협회가 신경을 썼다. 식재료는 충분히 가져가진 못했다. 신 감독 어머니가 싸준 고추장은 비행기 안에서 부풀어 터져버렸다. 운 좋게도 멕시코 교민들이 힘을 보탰다. 그런데 뜻밖의 호재가 있었다. 고기였다. 신 감독은 놀랐다.

“투우의 나라라서인지 소고기가 풍족했다. 단백질을 제대로 먹었다.”

평소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박 감독은 원흥재 코치와 함께 김치찌개를 끓였다. 입맛이 떨어질 틈이 없었다. 찌개 맛이 소문나 외국 언론이 박 감독을 ‘요리사’로 알 정도였다. 경기장 밖에서의 안정감은 경기력으로 이어졌다. 평소 다혈질인 박 감독은 멕시코에서 표정을 바꿨다. 1차전 스코틀랜드에 허무하게 졌는데 선수들을 다그치지 않았다. “괜찮다, 잘했다.” 이 한마디가 분위기를 바꿨다.

● 눈빛으로 통했다… 조직력과 투혼의 결정판

멕시코와의 2차전은 정오 경기였다. 해가 강렬했다. 안방팀 멕시코의 꾀였다. 해발 2200m, 아스테카 스타디움. 올해에도 월드컵 개막전이 열리는 곳이다. 7만2000명 관중의 일방적인 응원을 이겨내고 후반 44분, 상대 수비 몸에 맞고 튀어 오른 공을 신연호가 헤딩으로 꽂았다. 역전 결승골이었다. 그는 “후반엔 오히려 멕시코 선수들이 더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8강 우루과이 전은 상징적인 장면을 남겼다. 후반 9분, 신 감독은 “그 때 노인우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고 했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신연호가 전방 공간으로 뛰었다. 순간 수비수 사이로 노인우의 침투 패스가 신연호의 발에 배달됐다. 골키퍼와 1대1. 신연호는 골망을 흔들고 특유의 만세 세리머니를 했다. 선제골. 전반 페널티킥을 실축한 노인우는 집중력을 잃지 않고 실수를 만회했다. 전남 여수 한 동네에서 자라 초중고와 대학까지 함께한 두 친구의 합작품이었다. 신연호는 연장전에서 문전 센스로 결승골까지 터트렸다. 또 한 번 만세를 불렀다. 좀처럼 표정 변화가 없는 박 감독도 종료 휘슬과 함께 오완건 단장, 선수들과 엉켜 안고 울었다.

● 과거는 거울이다

‘장하다!대한의 아들들!’이라는 문구와 함께 열린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대표팀 환영식. 
대한축구협회 제공
‘장하다!대한의 아들들!’이라는 문구와 함께 열린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대표팀 환영식. 대한축구협회 제공
기세가 하늘을 찔러 4강에 가긴 했는데 선수들은 당시 한국의 열광을 몰랐다. 인터넷도, 실시간 소식도 없었다. 훈련과 경기에만 집중했다. 귀국 후 김포공항에서야 실감했다. “짐을 찾지 말라고 하더라. 그냥 기자회견부터 하라고 했다. 얼떨떨하게 나갔는데 그 때 알았다.”

1983년 멕시코는 한국 축구가 세계를 향해 눈을 뜬 순간이었다. 신 감독도 “한국 축구를 세계가 알게 된 시작”이라며 동의한다. 그 경험이 1986년 멕시코 월드컵으로 이어졌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 축구의 토대가 됐다. 아르헨티나, 이탈리아를 맞아 실제 그랬다. 43년 전 청소년 대표팀은 강한 체력, 조직력으로 기본 무장을 했다. 여기에 집중력, 끈기를 잘 섞었다. 4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승리의 공식이다. 북중미 월드컵을 앞둔 지금, 다시 멕시코를 떠올리는 이유다. 과거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일 수도 있다.

#멕시코#1983년#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신연호#박종환#북중미월드컵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트렌드뉴스

트렌드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