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령기자의 책·사람·세상]포켓북 혁명

  • 입력 2000년 6월 30일 20시 35분


최근 출간된 디자인하우스의 ‘대화’ 시리즈와 책세상의 ‘우리시대’ 문고는 한국출판시장에서 작지만 주목할만한 변화다. ‘구체적인 기획의도를 갖고 있는 국내창작의 포켓북’이라는 점 때문이다.

디자인하우스의 ‘대화’는 솔 바스, 얀 치홀트 등 20세기 디자인계 거장의 작품과 그 철학을 국내필자가 가상대화 형식을 빌려 소개한 시리즈. “너무 심각하거나 비싸서는 안된다. 들고다니기 편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권당 7000원짜리 포켓판으로 결정했지만 기획은 고급스럽다. 책을 펼쳤을 때 한쪽엔 글, 한쪽엔 이미지가 보이도록 계산한 편집 등은 이미 한국에도 번역된 갈리마르, 크세주 등 유명 외국 포켓북에 비해 처지지 않는다. “디자인 책들이 너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어 읽을만한 대중서가 드물다. 23년간 월간 ‘디자인’을 만들어온 전문성이 있는 우리가 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편집자 심세중씨) 책세상의 ‘우리시대’문고는 요즘 “바닥을 친다”고 할만큼 안 팔리는 인문학 주제의 시리즈. 그러나 기획자는 “구체적인 수요가 있다”는 역발상을 펼친다. “게놈이다, 뭐다 매일 직면하는 새로운 단어들에 당황하면서도 자신의 지적 공황을 해소하기 위해 두꺼운 책 잡을 시간은 없는 샐러리맨들”(김광식 편집부장)이 타깃 독자. 1차 출간분 중 ‘한국의 정체성’이 대형서점에서 베스트셀러에 끼는 등 출발은 좋다.

대중용의 포켓북이 얼마나 많이 읽히는가는 한 사회 독서력의 중요지표다. 한국사회에서도 이미 1930년대부터 끊임없이 포켓북 시도가 있었다. 박문, 을유, 정음, 문예, 동화, 삼중, 동서, 탐구, 사르비아…. 그러나 지금도 이와나미 등 100여종의 문고가 살아 움직이는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 문고는 늘 ‘반짝스타’였다. 마진이 적어 서점에서 아예 기피한다, 한국독자들의 책에 대한 태도가 너무 엄숙해 ‘모셔놓는 책이 아니라 읽고 버리는 포켓북은 발붙일 데가 없다’가 그 이유지만 원로출판인 전병석사장(문예출판사)은 조금 다른 반성을 한다.

“문고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좁은문’이 안 들어간 게 없었다. 새로운 정보, 지식을 발빠르게 전달해주든지 우리출판사만 할 수 있는 독특한 기획이라는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했으니….”

포켓북이 맥을 못 춘 90년대에도 ‘문고는 고전 리바이벌’ ‘글자만 빽빽이 들어찬 책’이라는 통념을 깬 대원사의 ‘빛깔있는 책들’ 시리즈나 ‘시공디스커버리총서’는 고정팬을 잃지 않았다.

포켓북은 무엇인가? 값싼 책? 작은 책? 창해출판사가 곧 번역출간할 프랑스 플라마리옹 포켓북 시리즈의 기획취지는 발상에서부터 저만큼 멀리 가 있다. ‘두꺼운 백과사전을 독자가 손에 쥘 수 있게 해체했습니다. 한권씩 모으면 나만의 맞춤사전이 됩니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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