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령기자의 책·사람·세상]우리독서풍경엔 '색인'이 없다

  • 입력 2000년 6월 16일 18시 50분


강호의 고수들은 책동네에도 있다. 개인소장도서 몇만권을 헤아리는 장서가를 두고 ‘고수’라 함이 아니다.

비록 가진 책은 몇천권(?)에 불과하지만 책 한권을 음미하는데 누구보다도 탁월한 ‘미식가’를 말하는 것이다. 이들을 구별짓는 일률적인 자격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가지 두드러진 행동양식은 있다. 똑같은 책을 읽어도 다른 사람들은 건져내지 못하는 정보를 낚아 올린다는 것이다.

한다하는 독서가들 사이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인 최성균씨(35). 그의 공식적인 직업은 컴퓨터 부품업체의 회계 및 영업사원이다. 그러나 최근까지 6년간 계간 ‘현대사상’의 기획위원을 맡기도 했다. 박사들과 나란히 앉아 학술지의 기획을 좌지우지했지만 학력은 ‘고졸’이다. 대학 진학 대신 출판사 취업을 택해 ‘책 읽기’를 학교로 삼았다.

자수성가형 독서가인 최씨가 책 속에서 제일 공들여 읽는 것은 저자가 쓴 ‘감사의 서문(序文)’이나 색인, 주(註), 참고문헌이다. 초보 독서가들이 본문으로 달려가기 위해 서둘러 넘겨버리기 십상인 이 부분에서 최씨는 학자들을 엮는 지적 네트워크를 읽어낸다.

왜 루마니아 출신의 종교학자 엘리아데의 ‘종교사개론’ 서문은 언어학자이자 인류학자인 프랑스의 조르주 뒤메지리가 썼을까. 티벳 불교 전문가 빌헬름 투치에 대한 인사는 그저 문헌적인 도움을 받았다는 의미일 뿐일까. 뒤메지리는 푸코와 들뢰즈의 학문적 대부인데 그렇다면 이들과 엘리아데 사이에 지적 연계는 없을까. 최씨는 이렇게 호기심을 거미줄처럼 확장시켜 관련 문헌들을 하나씩 추가로 읽어나가면서 자신의 지적 자산을 축적해왔다.

“제게 서문, 감사의 글, 색인 등을 읽는 일은 책에 명시되지 않은 지적인 배경을 밝혀나가는 일종의 퍼즐게임입니다. 인터넷에서 하이퍼링크를 통해 관련정보들을 축적하는 방식이 종이책에서는 바로 이런 색인이나 참고문헌 주(註)의 참조를 통해 이뤄지는 셈이죠.”

최씨의 독서법은 사실 독서가들, 혹은 직업적으로 책을 읽어야하는 교수 등 전문인들 사이에는 공통되는 자세다. 그러나 많은 독서가들은 한국책의 장정이 하루가 다르게 화려해지는 것과는 반대로 색인 참고문헌 등은 상대적으로 더 부실화한다고 아쉬워한다.

색인이 부실해지는 이유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원고단계부터 디스켓으로 넘겨져 예전에 비해 손가는 일이 줄었다고는 해도 색인작업은 여전히 편집자들 사이에 책 하나 쓰는 것만큼의 공이 필요한 일로 표현된다. 그래서 아예 색인 만들기를 포기하는 출판사들도 생긴다. 원서에는 몇십페이지에 걸쳐 색인이 명시돼 있는데도 번역판을 낼 때 눈 딱 감고 색인을 생략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연초 출간된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 초판도 그런 안타까운 사례의 하나였다.

그러나 편집자들이 색인 만들기에 열의를 덜 갖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한국의 독서풍토에 있다. 공들여 만든 색인을 독자들이 ‘쓸데없이 페이지 수만 늘린 것’으로 취급하며 그 가치를 알아채지 못하는 데 허탈해지는 것이다.

검색어 하나로 필요한 정보를 정렬해내고 하이퍼링크를 통해 실시간으로 관련 정보를 찾아가는 인터넷의 신기에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러나 사실 종이책은 이미 청나라대에 ‘사고전서 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라는 분류목록집으로 하이퍼링크의 원조를 보여줬다. 색인작업에 대한 고전적인 열정을 회복하는 일은 종이책의 위기가 얘기되는 시대에 종이책의 경쟁력을 갖추는 일인지도 모른다.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