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주한미군, 점령군 행세 말라

  • 입력 2000년 6월 6일 19시 14분


전두환씨의 철권통치가 횡행했던 1980년대 우리의 지식인 사회에는 미국을 ‘신제국주의’로, 주한미군을 ‘점령군’으로, 한국을 ‘미제의 신식민지’로 보는 견해가 유행한 적이 있다. 이런 시각을 견지한 젊은이들은 지금도 있다. 과연 이들은 구제불능의 교조주의자일까? 유감스럽게도 요사이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다.

▼50년대 특혜 아직도 그대로▼

미국 행정부와 주한미군사령부의 고위인사들에게 묻는다. 만약 ‘점령군’이 아니라면 그대들은 주한미군을 무엇으로 규정하는가. 미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한반도를 잠시 ‘점령’했다가 떠났고, 6·25전쟁이 터지자 ‘아시아의 적화를 저지하기 위해’ 돌아왔다.

미군은 그때 가져간 작전지휘권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움켜쥐고 있으며 당시 군사적 필요성 때문에 ‘점령’ 또는 ‘수용’했던 땅에 아직도 그대로 머물러 있다. 미군 스스로 필요 없다고 판단해서 돌려줄 때까지 대한민국은 그 땅에 대해서 어떤 권리도 행사할 수 없다. 한국 국민과 정부가 아무리 간절하게 호소해도 그대들은 주한미군 지위에 관한 협정(SOFA)을 개정하기 위한 협상에 성의있게 응하지 않는다.

한번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자. 만약 어떤 외국 군대가 미합중국의 영토 안에서 그런 지위를 누리면서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그대들은 그 군대에 ‘점령군’이 아닌 어떤 다른 이름을 붙여줄 것인가.

나는 주한미군을 ‘점령군’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점령군’으로 행동한다. 미국 행정부와 주한미군사령부는 최근 매향리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가 한국 국민의 가슴속에 불러일으키고 있는 분노와 수치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자세가 전혀 없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남북한 사이의 군사적 적대관계를 전제로 할 때 주한미군은 한반도에서 ‘힘에 의한 평화’를 보장하는 ‘전쟁 억지력’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군이 하는 모든 일이 정당한 건 결코 아니다. 우리 국민에게 미국과 주한미군은 매우 두려운 존재다. 우리는 오랜 세월 한국정부를 욕하면 집시법 위반으로 짧은 징역을 살지만 미국과 미군을 비난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야 할지도 모르는 세상을 살았다. 성조기를 불태우는 똑같은 행위가 미국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행사한 것으로 헌법의 보호를 받지만 한국에서는 중대한 반체제 범죄로 처벌받는 것을 보았다. 어린 쿠바 소년 엘리안의 인권을 두고 사회가 벌컥 뒤집힐 정도로 야단법석을 떠는 나라의 군대가 매향리 주민들의 짓밟힌 삶에 대해서는 일말의 동정심조차 표명하지 않는 것을 목격했다.

인권과 민주주의는 스스로 쟁취하는 것임을 잘 알지만 나는 미국 행정부가 한국에 대해서는 자기네가 높이 받드는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적용할 필요가 없는 사회로 취급하는 데 대해 언제나 분노와 수치심을 느껴왔다. 지난 역사가 미군의 존재와 관련해 만들어 놓은 금기와 공포감 때문에 그대로 표출되지 않았을 뿐 이런 느낌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점령군’의 가장 뚜렷한 징표는 오만이다. 지난달 18일의 오폭사건이 매향리 주민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다는 한미합동조사위원회의 발표가 나온 직후인 6월 2일 정오 미군은 주민들의 항의시위가 벌어지는 가운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폭격훈련을 재개했다. 청년들이 거리에서 성조기를 불태우든 말든, 매향리 주민들의 고통에 국민의 공감이 확산되든 말든, 코앞에 다가온 남북정상회담과 평화무드에 고춧가루를 뿌리든 말든 자기네는 상관없다는 뜻이다. ‘점령군의 오만함’이 아니면 다른 어떤 말로 이런 무모한 행위를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민 분노에 귀기울이길▼

주한미군은 단순한 군사적 존재가 아니라 한미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존재이기도 하다. 주둔지 국민의 정치적 지지가 없으면 주둔군의 군사적 목표도 달성하기 어렵다. 미국 행정부와 주한미군은 초강대국의 위세 앞에 주눅든 한국 군부와 관리들의 고분고분한 태도에 자족할 것이 아니라 한국 국민의 가슴속에 들끓는 분노에 대해 지금이라도 마음의 눈과 귀를 열어야 한다.

유시민(시사평론가)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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