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코묻은 돈과 대통령 호통

  • 입력 2000년 5월 29일 19시 28분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민혁명군에 포위됐을 때 궁전을 마지막까지 지킨 것은 프랑스군대가 아니었다. 수비대가 모두 도망갔지만 스위스 용병 220명은 남의 나라 왕과 왕비를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전원이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

시민혁명군이 퇴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도 스위스용병은 ‘계약기간이 수개월 남아있다’는 이유로 그 제의를 거절했다. 당시 전사한 한 용병이 가족에게 보내려 했던 편지에는 ‘우리가 신용을 잃으면 후손들이 영원히 용병을 할 수 없기에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계약을 지키기로 했다’는 글이 씌어 있었다.

오늘날까지 스위스 용병이 로마교황의 최측근 경비를 담당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데는 그런 배경이 있다.

스위스 용병의 신화는 다시 스위스은행의 신화로 이어진다. 용병들이 송금했던 ‘피묻은 돈’을 관리하는 스위스은행의 금고는 그야말로 신앙처럼 지켜야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결과 이 나라 은행은 안전과 신용의 대명사가 되어 이자는커녕 ‘돈 보관료’를 받아 가면서 세계 부호들의 자금을 관리해주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금융시장이 불안해져 국가경제 전체가 악영향을 받으면서 은행부실은 다시 화급한 현안으로 등장했다. IMF관리체제 직후 정부가 금융권의 부실을 64조원이라고 발표했고 세계은행은 114조원이 넘을 것이라고 했다. 4인 가족 기준 가구당 1000만원 가까운 돈을 부담해야 한다는 계산이고 보면 이런 나라에서는 그저 무지렁이 백성들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그 정도라면 걱정이 없겠다. 엊그제 만난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그가 근무하는 은행에 대해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부실과 자신들이 내부적으로 확인한 실제 부실과는 엄청난 괴리가 있더라고 실토하고 “그 비율로 금융권 전체의 진짜 부실을 역산한다면 그 규모는 200조원도 넘을 것”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97년말 IMF관리체제가 시작된 직후 정부가 서둘러 취한 조치는 부실은행 정리였다. 5개 은행이 강제 퇴출되고 9개 은행의 동시 다발적 합병이 이뤄지면서 서너 명에 한 명 꼴로 은행원들이 거리에 내몰리는 고통 끝에 작년 이맘 때 정부는 은행의 ‘성공적 구조조정’을 IMF극복의 대표적 치적으로 선전했다. 그리고 1년이 더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은행부실이 얼마인지 조차 모르는 한심한 상황을 맞고 있는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원인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은행구조조정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다. 국민은행과 장기신용은행 합병 당시 정부는 소매전문 국민은행과 도매전문 장은이 합병되면 도소매를 아우르는 영업상 시너지가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통합을 채근했다. 그런데 막상 두 은행이 합병하고 난 결과 장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기대했던 시너지는 완전히 실종되었다.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친 한빛은행의 태생 과정은 또 어땠는가. 정부가 통합을 독촉하면서 준 당근은 3조2000억원의 공적자금이었다. 정부는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우겼지만 새로 탄생한 한빛은행은 정상화하지 못하고 오늘날 다시 통합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발생의 근원을 해결하는 작업이 선행되지 않는 한 은행부실화는 반복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결론인데도 요즘 화두는 또 한번 은행간 합병이다. 어떻게 부실을 정리하겠다는 청사진도 없는데 무작정 은행을 대형화하기만 하면 부실은 저절로 없어진단 말인가.

정부의 뒷심이 부족한 것인지, 은행들의 고집이 센 탓인지, 혹은 국민이 모르는 어떤 다른 심각한 이유가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언제적 금융개혁이 지금까지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시장을 불안하게 해야 하는지 정말 답답할 뿐이다.

스위스은행처럼 ‘피묻은 돈’은 아니더라도 초등학생의 ‘코묻은 돈’이라도 철저하게 지켜주겠다는 의지가 정부나 은행에 있었다면 과연 우리 금융기관들의 꼴이 이렇게 됐을까.

마침 김대중대통령이 6월말까지 불확실성을 제거하라고 호통을 쳤으니 이번만큼은 불확실성의 진원인 은행의 부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정직하게 발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제대로 된 해법을 내놓아 대가가 어느 정도이든 이번에는 은행부실 논란에 마침표가 찍혔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다. 작은 고통이 계속되는 것 보다 단 한번의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이 국민경제에는 해악이 덜하다.

이규민 <논설위원>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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