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윤종훈/경영 민주화는 언제쯤…

  • 입력 2000년 4월 27일 19시 11분


북한이 전세계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가장 큰 이유는 권력의 세습 때문이다.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청년시절부터 차기 지도자로 내정돼 지도자 수업을 받았고 수많은 잠재적 정적을 물리친 후 결국 권력세습을 완성시킨 나라. 섹스 스캔들로 인해 대통령이 조롱거리가 되고, 말 한번 잘못해 총리가 물러나는 민주국가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나라이다.

반면 남한에서는 지난 10년간 정치민주화가 크게 진전됐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분야 그 중에서도 특히 기업문화는 어떠한가?

삼성그룹 이건희회장은 삼성자동차에 대한 중복 과잉 투자로 삼성그룹은 물론 한국 경제를 한때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에 대해 삼성그룹 내부에서 어떠한 징계나 최소한의 문제제기 조차도 없었다. 1년 단위로 경영성과를 측정해 실적이 안좋은 경영자는 주주총회에서 가차없이 내쫓는 서구 선진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건희회장은 95년부터 각종 변칙증여수단을 동원해 장남 이재용씨에게 수조원의 재산을 물려주면서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를 사실상 마무리지었다. 경영자로서의 자질을 아무것도 검증받지 않은 30대 초반의 청년이 재벌총수의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조원의 재산을 물려받고 한국 최고 그룹의 경영권을 장악했으며, 그 과정에서 낸 세금은 고작 16억원뿐이다. 그가 경영일선에 전면 등장했을 때를 상상해보자. 그가 경영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청년이 판단을 잘못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 경우 삼성그룹이 어렵게 되는 건 물론이고 한국 경제 전체가 다시 구렁텅이에 빠질지도 모를 일이다.

어릴 때 누구나 한번쯤 좋은 장난감을 차지하려고 형제끼리 싸운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서로 합의가 안되면 결국 아버지가 나서서 해결해준다. 얼마전 현대그룹에서 발생한 왕자의 난이 어린아이의 장난감 싸움과 무엇이 다른가? 한국 최고그룹의 최고경영자들이 보여준 유아적인 태도가 놀랍기만 하다.

현대그룹 왕자의 난 이후 외국인 투자자가 재벌그룹에 보내는 시선은 더욱 차가워졌다. 그들의 눈에 재벌가는 구소련 시대의 크렘린궁을 연상시킨다고 한다. 구소련시대에 국정에 관한 중요한 의사결정은 크렘린궁에 있는 1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의회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재벌기업의 경영에 관한 중요한 의사결정은 총수 1인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사회는 들러리에 불과하다. 구소련시대에 권력암투는 크렘린궁 안에서 벌어졌고 그 속에서 결정났다. 국민은 구경꾼에 불과했다. 재벌그룹의 경영권 승계 암투는 재벌가의 저택안에서 벌어지고 그 속에서 결정난다. 주주는 구경꾼에 불과하다.

재벌그룹의 봉건적인 지배구조, 재벌총수의 봉건적인 의식구조를 타파하지 않고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를 진정으로 극복했다고 볼 수 없다. 그들이 언제 다시 황제의 권한으로 무책임한 경영을 벌여놓고 그 짐을 국민에게 떠넘길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 마쓰시타전기의 창업주 가족이 경영일선에서 퇴진했다. 경쟁사인 소니가 핏줄과 각종 인맥을 떠나 유능한 인재를 과감하게 발탁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경영진에서 ‘능력이 없는데 피가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임원에 앉히진 말라’는 창업자의 유언을 들어 세습비판론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할까? 현재로 보아서는 재벌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세습 비판론이 나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국세청에서 재벌기업의 주식이동 상황을 조사해 재벌가의 변칙상속 증여를 막겠다고 나선 일은 매우 반길 만하다.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 재벌들과 연계된 일부 정치권의 세무조사중단 압력에 국세청이 굴복하는 것은 아닌지? 지난 국정감사 때 일부 국회의원들이 이건희회장과 이재용씨를 증인으로 출석시키자는 요구에 적극 반대했던 일을 생각하면 괜한 기우는 아닌 듯싶다.

윤종훈(회계사·참여연대 조세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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