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개관 30돌 갤러리현대 박명자대표

  • 입력 2000년 4월 2일 21시 07분


우리나라 화랑 문화를 선도해오며 이중섭 박수근 등을 ‘국민 화가’로 부각시키는데 큰 몫을 해낸 갤러리현대가 4일 국내 화랑으로는 최초로 개관 30주년을 맞는다.

1961년 화랑업계에 발을 딛은 이래 40년만에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상(畵商)이 된 갤러리현대 박명자(朴明子·57)대표. 개관 30주년 기념전(7∼25일·무료) 준비에 바쁜 그를 찾았다.

―화랑과 인연을 맺은 계기는….

“여고졸업 직후 이대원선생(전 홍익대총장)이 운영책임을 맡고 계시던 반도호텔 1층의 여섯평 반 남짓한 반도화랑에 첫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그림을 사고 판다는 개념이 없었을 때였지요. 박수근선생의 3호 그림이 3000원(현재 3억원 호가)하던 시절이니까요. 차츰 그림에 안목과 애정을 갖게 됐지요. 70년 4월 운보 김기창 우향 박래현 선생 부부의 권유로 인사동에 현대화랑을 열어 독립했고 75년 종로구 사간동으로 이사한 뒤 95년 갤러리 현대로 개칭,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습니다.”

▼전시회 300여회 개최▼

―그동안 전시회는 얼마나 하셨습니까.

“300여회쯤 됩니다. 인사동에 현대화랑을 개관했을 때 어느 신문에 ‘예술을 팝니다’는 제목의 기사로 소개된 기억이 납니다. 당시만해도 화랑은 요즘의 벤처기업이었지요. 인사동 시절의 이중섭 천경자 변관식전, 사간동으로 와서는 이응로 김창렬 이우환 장욱진 백남준전과 박수근30주기 서세옥 유영국 이중섭특별전이 기억에 남습니다.”

―현대 화랑의 전시 역사는 바로 우리 현대회화사나 다름없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나름대로 지켜온 원칙이 있을 것도 같은데요.

“두가집니다. 아무리 유명한 인사라고 해도 직업이 화가가 아닌 사람의 전시회는 하지 않았던 것과 지위가 높거나 인품이 좋아도 그림이 좋지 않은 화가의 작품은 전시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중섭 '황소'에 깊은 감동▼

―가장 보람이 있었던 점은….

“중진과 대가들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었던 점입니다. 생전에 평가를 받지 못한 분들을 사후에나마 평가되도록 계기를 마련했고 그 분들의 작품을 모아 도록이나 아트 포스터를 만들어 일반에 보급한 것도 큰 보람입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습니까.

“72년 이중섭전을 하는데 한 귀퉁이에 걸린 붉은 색 바탕의 ‘황소’그림이 저를 사로잡아 매일 아침 문을 열기전 30여분씩 홀로 그림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어떤 외국 대가의 그림도 그같은 감동은 주지 못했습니다. 그 때 출품된 작품 중 당신 내외의 처지를 표현한 ‘부부’를 당시로서는 큰 돈인 20만원에 구입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습니다.”

―우리나라 화랑은 어떻게 변화해 왔습니까.

“70년대에야 그림을 사고 파는 공간으로서 화랑의 개념이 도입됐지요. 80년대 주거 형태가 아파트 위주로 바뀌면서 동양화 위주의 구매 패턴이 아파트 실내 장식에 걸맞는 서양 유화 중심으로 변했고 추상작품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습니다. 80년대말은 그림경기가 지나치게 과열된 측면이 있었고 90년대말 IMF사태로 화랑들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최근에는 주부들의 문화적 욕구가 늘어나면서 컬렉션 경향이 대가위주에서 다양한 작가군으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그림 값이 너무 높다는 얘기들이 많은데요….

“해마다 국내에서 10만명의 미대 졸업생이 배출된다는데 그림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분이 얼마나 되겠어요. 외국의 대가 중에는 교수 직함을 가진 이가 드문데 우리나라는 단순히 화가라고 하면 이웃에서 조차 인정을 안해 줍니다. 화가명함만으로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감상 방해 붉은색옷 안입어▼

―화랑 주인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첫째 안목, 둘째 그림을 사랑하되 소유하려 들지 말 것, 셋째 이익이 적더라도 반드시 애호가에게 그림을 넘겨줄 것 등이지요. 저는 손님들의 그림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화랑을 하면서 한번도 붉은 색 계통의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직원들에게도 절대 튀는 옷이나 장식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앞으로는 젊은 작가 발굴에 더 관심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갤러리현대가 2대(代), 3대로 이어지면서 화랑의 문화적 소명을 다하는 공간이 되도록 할 겁니다.”

<오명철기자> oscar@donga.com

▼박명자 대표가 만난 거장들▼

박명자대표는 3시간여의 인터뷰 도중 기라성 같은 화가들의 그림 밖 인생과 일화를 ‘양념’처럼 털어놓았다. 인터뷰 기사의 디저트 삼아 짧게소개한다.

▽이중섭〓유일하게 한 번도 뵙지 못한 분이다. 1972년 친구분들의 요청으로 첫 전시회를 열 때 작품을 모을 수가 없어 언론에 협조를 요청했더니 다들 크게 다뤄주셔서 100여점을 모았고 이중 70여점의 진품을 가려내 전시회를 열었다.

▽박수근〓제일 좋아하는 화가다. 당뇨로 고생하셨던 말년에 거의 매일 반도화랑으로 출근하셔서 의아했는데 나중에 사모님이 쓴 글을 보니 호텔에 있는 양변기를 이용하기 위해 그러셨다더라. 더 잘해드릴 걸….

▽김환기〓그림과 인품이 모두 훌륭한 분이셨다. 사모님인 김향안여사의 남편에 대한 추모의 정이 각별하다.

▽오지호〓그림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그림 값을 낮춰 달라고 말씀하신 유일한 분이다. 전시회 수익금 전부를 털어 고서를 사신 학구파셨다.

▽장욱진〓천진한 어린아이와 같았던 분이다. 작품과 인생이 모두 즐겁고 심플했다. 오래도록 사랑을 받을 그림이다.

▽도상봉〓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전시장에서 자기작품을 오래 들여다 보는 사람을 가장 좋아하셨다. 언젠가 부축해서 택시를 태워 드리려는데 운전기사들이 모두 지나치자 “도상봉을 몰라본다”며 호통을 치셨다.

▽김 원〓이북에서 함께 피난와 부동산재벌이 된 친구가 “그림 한 점 달라”고 하자 “그럴테니 너는 빌딩 한 채를 내게 다오”했다는 일화가 있다.

▽백남준〓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비디오 아트’라는 한 예술 장르를 창시했다. 작품을 팔아 번 돈을 전부 다음 작품 제작에 모두 쏟아넣는 분이다. 88년 이전까지만 해도 일제 TV로 작품을 제작하셨는데 내가 이건희 삼성회장 내외분과의 만남을 주선한 뒤 삼성에서 지원을 많이 했다.경제 전반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예술하는 사람이 돈에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 좋지 않게 얘기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 분에겐 심각한 문제다. 우리정부가 하루빨리 기념관을 만들어 드리고 돈 걱정없이 작품을 제작하실 수 있도록 독지가들이 나서야 한다.

덧붙여 그는 “훌륭한 화가의 뒤에는 반드시 훌륭한 부인이 있었다. 평범한 부인들에 비해 몇 십배, 몇 백배 더 고통을 겪은 화가 부인의 기막힌 내조에 관한 얘기를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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