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다시부는 영어 열풍/"영어=생존수단" 확산

  • 입력 2000년 2월 29일 19시 10분


29일 오전 8시 서울 종로구 S영어학원. 20여개의 강의실마다 수강생들로 만원이었다. 수강생 중에는 대학생뿐만 아니라 신사복 차림의 직장인도 많았고 나이 지긋한 중년 남녀의 모습도 꽤 눈에 띄었다.

이 학원에는 올들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수강생이 30% 이상 늘었다. 인근에 최근 영어학원이 하나 새로 문을 연 것을 감안하면 폭발적인 증가 추세다. 강사 김모씨는 “요즘은 영어를 배우는 사람이 초등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기업체, 정부부처 간부나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도 많다”고 전했다.

초등학교 5학년인 길모군(경기 과천시 부림동)은 지난 겨울방학부터 친구 4명과 함께 일주일에 두시간씩 미국인 강사를 초빙해 영어회화를 배우고 있다. 학부모 박모씨(40)는 “요즘 초등학생 치고 영어를 배우지 않는 아이는 거의 없다”며 “그동안 아이를 학원에 보냈는데 효과가 적은 것 같아 과외를 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영어는 생존 수단▼

올들어 영어열풍이 다시 불고 있다. 토익시험을 주관하는 국제교류진흥회에 따르면 올해 1∼3월 중 토익시험에 응시했거나 응시원서를 제출한 사람은 모두 16만5283명.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55.5%(5만8996명)가 늘었다.

기업은 물론 정부 부처도 올들어 영어를 못하는 간부는 승진심사에서 누락시키겠다는 계획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통계청은 지난달 컴퓨터와 영어실력이 일정 수준에 미달하면 사무관과 서기관 승진심사에서 제외하겠다고 발표해 공무원들이 긴장하고 있다.

국방부도 최근 올해부터 2002년까지 대위∼대령의 고급장교 진급심사에서 영어능력을 평가, 최고 1점의 가산점을 부여하기로 했다. 2003년부터는 장교 진급심사에 영어능력이 의무적으로 반영된다. 육군사관학교 역시 앞으로 영어성적이 미달되는 생도는 퇴교조치까지 하겠다는 계획.

그런가 하면 교육부는 올해부터 단계적으로 초중고교의 영어수업을 영어로만 진행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아 학교의 영어학습 풍경이 완전히 달라질 전망이다.

▼왜 다시 영어인가▼

영어에 대한 관심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의 ‘영어 열기’는 과거보다 훨씬 절박한 이유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

현재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는 정보의 80% 가량이 영어로 돼 있고 ‘국경 없는 경제’시대를 맞아 외국인과의 직간접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영어를 못하면 지식정보사회에 낙오자로 전락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영어에 대한 학습열기를 가속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양대 한문섭교수(영어교육과)는 “과거에는 영어능력이 하나의 특기로 인식됐지만 점차 영어 못하는 사람은 무능력자로 취급받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최근 일본에서 제기되는 영어 공용화론도 한국사회의 영어 열기를 가열시키는 데 큰 몫을 했다.

▼문제는 없는가▼

한국인의 영어 구사능력은 선진국은 물론 우리보다 경제력이 뒤진 개발도상국보다 모자라는 게 현실. 미국의 토플시험 공인기구 ETS가 98년 7월부터 1년간 시험을 치른 아시아 21개국 응시자의 성적을 집계한 결과 한국은 응시자 6만1667명의 평균점수가 535점으로 9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영어열풍의 부작용도 적지 않다. 영어가 필수적인 분야에선 당연히 영어를 잘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영어능력 부족을 이유로 무조건 불이익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는 지적이 많다.

최근 유교철학을 전공한 성균관대생이 영어성적 미달로 올해 졸업이 취소되자 소송을 제기한 것도 이같은 문제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

경희대 한학성교수(영어교육과)는 진급심사에서 영어성적을 반영하겠다는 국방부 계획에 대해 “작전이나 전투 지휘능력이 뛰어난 장교가 영어를 못해 진급할 수 없다면 결국 우리 군의 전투력 저하를 초래하는 것”이라며 ‘영어 만능론’에 이의를 제기했다.

<홍성철기자> sung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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