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비망록의 「일그러진 얼굴들」

  • 입력 1999년 7월 6일 18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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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무원의 비망록에서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게 된다. 경기 화성군 씨랜드 화재참사를 통해 드러난 군청 부녀복지계장 이장덕씨(현재 민원계장)의 비망록에는 이 시대를 사는 한국인의 추한 얼굴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불법영업을 관철하려는 업자와 그것을 돕는 관청 상사의 압력에 짓눌린 한 무력한 공무원의, 규정과 원칙을 팽개치고 손들어야했던 그의 절규를 흘려넘겨서는 안될 것 같다.

하나의 ‘얼굴’은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공무원을 회유 매수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평균적인 ‘업자의 얼굴’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규정과 절차가 무엇이건 간에 나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업자가 어디 하나 둘인가. 힘과 연줄 돈을 동원해서라도 일을 해치우고야 말겠다는 천민(賤民)적 자기중심주의에서 나만은 예외라고 외칠만한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뇌물죄는 돈을 준자(청탁자)와 받은자(공무원) 모두를 처벌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돈을 주면서라도 제몫만을 챙기고 질서를 흐리고 규정을 어기며 결과적으로 공익을 해하는 빗나간 민원인을 막자는 취지다. 비리 공무원도 문제지만, 그에 앞서 제 이익만을 남기기 위해 공무원에게 돈을 주는 추한 민원인이나 업자도 사라지지 않으면 안된다.

또 하나의 일그러진 ‘얼굴’은 우리 공직사회의 불건전한 상명하복 메커니즘이다. 군수나 과장같은 ‘윗물’이 업자에게 휘둘리게되면, 아래 실무 공무원의 규정과 원칙을 내세운 ‘공익 지키기’는 무력화되고 마는 양태가 고스란히 비망록에 담겨 있다. 우리 주변에 지천으로 널린 상하관계의 부조리가 하나의 비망록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이 사회의 거미줄처럼 얽힌 부패구조에서 한 개인이 불의를 터뜨리고 저항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비망록은 분명하게 말해준다.

아울러 이번 참사를 통해 지방자치단체들이 세원(稅源) 확보라는 미명하에 숱하게 내준 이상한 인허가에 대해 점검할 것을 정부에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씨랜드처럼 부실 불법여부를 가리지 않고 세수(稅收)를 내세워 무더기로 건축물인허가를 해준 케이스가 적지 않다는 보도다.

더욱이 민선 단체장들은 선거과정에서 숱한 지원자 지지자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되고, 그 지원자에게 발목잡혀 행정을 그르침으로써 빚어진 단적인 예가 이번 씨랜드 참사인 것으로 경찰 수사결과 드러나고 있다. 정부는 인허가상의 문제와 함께 장마철을 앞두고 취약 건축물 등에 대한 점검을 벌여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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