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이인길/반도체 빅딜의 함정

입력 1998-11-11 19:37수정 2009-09-2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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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재계엔 두 정부 당국자가 한 ‘말씀’이 단연 화제다.

한 분은 불공정행위를 심판하는 전윤철(田允喆)공정거래위원장이고 또 한 분은 산업정책을 총괄하는 박태영(朴泰榮)산업자원부장관이다. 전위원장은 며칠전 미국 연방거래위원장을 만났을 때 이런 요지의 발언을 했다.

“빅딜은 어디까지나 시장경제원리에 의해 진행되고 있으며 정부는 여기에 개입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박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반도체는 세계경기 부진에도 불구하고 현대와 LG가 내년에만 1조원씩 추가로 투자해야하는 과잉투자 업종이며 강력한 구조조정이 요구된다.”

빅딜이 정부의 각본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삼척동자가 다 아는 상식인데 무슨 시장경제인지 앞뒤가 맞지 않고 정부에서 말하는 사람마다 의미가 다르니 도무지 헷갈린다. 1조원 투자금액도 어디서 나온 숫자인지 정작 해당기업에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사정이야 어떠하든, 강제든 자율이든 빅딜이 대기업의 생존과 경제위기 극복에 필수적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여기엔 전제가 있다. 충분한 산업정책적 검토와 국가이익에 부합하느냐 하는 문제다. 이점에서 보면 정부의 빅딜정책엔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 많다.합병문제를 놓고난항을겪고 있는 반도체가 그중의 하나다.

지금 상황을 보면 정부는 우격다짐으로 합병을 몰아붙이는 입장이고 당사자인 현대와 LG는 경영주체를 놓고 한치 양보없이 맞선 상태에서 시간만 흘러가는 형편이다. 실사 평가기관을 선정했다고는 하지만 결과에 승복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반도체 문제가 이렇게 꼬인 것은 첫단추를 잘못 끼운데 원인이 있다. 빅딜은 원래 시작부터가 경제보다는 다분히 정치적 논리에서 출발했다.

6월 박태준(朴泰俊)자민련총재가 처음 주도한 빅딜의 초안은 삼각빅딜이었다. 삼성이 자동차를 현대에 주고, 현대는 유화를 LG에 넘기고, 삼성은 LG의 반도체를 가져가는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사업교환이었다.

이 방안은 기아입찰이 진전되면서 물건너가는 듯하다가 산자부가 느닷없이 구조조정 대상 7개 업종에 반도체를 포함시키면서 다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정부의 강압에 눌려 원칙엔 합의했지만 애초부터 무리가 따랐다.

정부의 논리는 간단하다. 투자자금이 너무 큰 중복 과잉투자업종에다 부채비율이 높다는 것외에 뚜렷한 게 없다.

다른 업종과 똑같이 적용한 이같은 선정 잣대가 반도체의 특수성에 과연 적합한 지는 한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부채비율만 해도 그렇다. 현대가 935%, LG가 617%로 대단히 높은 수치지만 이중 상당부분은 IMF체제이후 환율상승으로 높아진 것이고 재무구조는 현대 LG만 그런 게 아니다. 반도체 경기침체로 전세계 메모리업체가 비슷하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처지다. 중복과잉의 기준도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온다. 반도체는 생산물량의 88%가 수출이고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12.8%를 차지한다. 기술력과 생산력이 세계 최고다. 독자적인 경쟁력을 갖춘 유일한 첨단 품목이 바로 반도체다.

그렇다면 구조조정도 당연히 세계시장의 적자생존과 약육강식, 다시말해 경쟁력 메커니즘에 맞춰 추진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더더욱 죽을 쑤던 반도체경기가 급속히 회복되는 마당이다.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정부의 ‘체면’은 접을 수가 있지 않겠는가.

이인길<정보산업부장>kung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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