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현장 긴급점검⑤]겉도는 지원정책 「현장중시」아쉽다

  • 입력 1998년 10월 1일 19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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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 대불공단의 한라중공업 협력업체 R사. 7월에 나온 한국은행의 중소기업 지원책에 따라 최대 5억원의 대출 후보업체로 뽑혔다. 중소기업청은 ‘보내는 서류를 은행에 제시하고 대출을 받으라’는 공문까지 보내왔다. 그러나 거래은행은 전혀 딴판. 창구직원은 “담보가 부족한데 무슨 대출이냐”고 호통을 쳤다.

R사는 공단 부지 값만 이미 14억원을 냈다. 앞으로 7천만원 더 내면 분양대금을 완납한다. 그러나 은행측은 ‘등기이전이 안됐다’며 여전히 담보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

추가대출을 받지 못하면 그동안 쏟아부은 투자비를 모두 공중에 날릴 판이다. 이 회사 간부 P씨는 중기청이 보내준 공문을 보여주며 “이젠 정부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기 힘들다”고 허탈해했다.

광주의 전자업체 K사 사장 L씨는 8월 정부 외곽단체가 주최한 행사에 참석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기업애로 사항을 털어놓으라는 요청을 받고 허심 탄회하게 금융권을 비판했다가 거래은행들로 부터 일제히 대출금 회수압력을 받은 것. 이 소문이 퍼지면서 결국 K사는 부도를 냈고 이후 광주지역에서 ‘은행비판’은 금기시됐다.

또다른 전자부품 업체 M사 대표 H씨는 “자산가치가 폭락하고 있는 현장상황을 도외시한 정부의 중기지원책은 ‘생색내기’ 그이상 그이하도 아니다”며 “한마디로 한심하다”고 혹평했다.

울산 현대자동차 1차 협력업체인 E사는 연초부터 외국 유명자동차업체 3,4곳으로부터 제품견적서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고있다. 원화가치 하락으로 가격이 헐해진 한국산 부품에 관심이 커진 것.

미국의 한 업체는 ‘연 2백50만개를 납품할 수 있겠느냐’고 구체적인 요청을 해왔다. E사 Y이사는 그러나 “은행측에 설비투자액 지원을 타진했다가 핀잔만 들었다”며 “한해 1천만달러 이상 외화를 벌어들일 기회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남 창원시가 올해 중기자금 지원용으로 확보한 자금은 모두 1천억원. 그러나 9월까지 창구에서 빠져나간 돈은 4백억원에 불과하다. 담보여력이 거의 없기 때문.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는 “은행권의 담보대출 관행을 없애지 않는 한 정부의 실물경제 살리기는 공염불에 그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자금사정에 찌들린 중소기업들의 ‘원성’이 터져나오면서 부산 창원 구미 등 주요 산업단지는 정치권 인사들의 단골 현장시찰지역이 됐다.

이 지역 상의 관계자들은 기업들의 현장 애로사항을 접수, 이들에게 설명하기 바쁘다. ‘돈가뭄을 해결해달라’는 요청이 95%에 달한다는 게 상의 설명. 상의 관계자는 그러나 “개선기미가 안보이자 요즘엔 애로센터를 찾는 기업인마저 줄었다”고 말했다.입이 아프게 호소해도 돌아오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다.

수출이 6월 이후 감소세로 돌아서면서 수출회복은 국정 최고목표가 됐다. 하지만 수출 주무부서인 산업자원부조차 재정경제부의 협조를 얻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다. 지난달 30일 산자부가 개최한 2차 정부수출비상대책반 회의엔 재경부는 물론 산업은행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수출기업의 애로 및 지원방안 대부분이 은행들의 수입신용장 한도확대나 수출환어음 매입 등에 맞물려 있어 이들이 빠진 수출확대책은 시간낭비라는 지적이 나왔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28일 경제 기자회견에서 “금융구조조정이 끝나면 통화가 신축적으로 운영되고 금리도 내려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실물 현장에서 만난 기업인들, 특히 중소기업 경영진들중 이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동안 쏟아졌던 각종 수출지원 중기지원 대책이 금융권의 담보관행 보신주의에 가로막혀 은행권에서만 맴돌았음을 피부로 느끼기 때문이다.

딱하기는 은행도 마찬가지.

“정부 사람들 뭘 몰라도 한참 모릅니다. 요즘처럼 내일을 모르는 판에 뭘 믿고 돈을 빌려줍니까. 떼이면 목이 달아나는 것은 은행직원입니다.” 한 지점장의 말. 그러면서 그는 “쏟아지는 정부 정책, 우리는 별 관심없습니다”고 말했다.

〈박래정·이명재기자〉ecopark@donga.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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