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 25]기업인들 체면중시 안한다

  • 입력 1998년 7월 30일 19시 26분


최근 한국시장 진출을 선언, 국내 할인점 업계에 비상을 건 초우량 유통업체인 미국의 월마트. 지난해 1백65조원 어치를 팔아치운 ‘고질라’급 거대기업이다.

그런데도 미국 아칸소주 벤튼빌에 있는 4평가량의 롭슨 월튼 회장 집무실엔 안락의자도 없이 낡은 의자와 14인치 TV, 컴퓨터만 놓여있다. 다른 임원 방도 마찬가지다. 회장 등 임직원들은 커피를 직접 타서 마신다. 회장실 옆 화장실엔 누런색 재생화장지가 걸려있다. 다만 고객을 위해 매장 만큼은 불편함이 없도록 최고로 꾸민다.

후지필름과 함께 세계 필름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이스트만 코닥. 회장 임원용 간부식당이 따로 없다. 세계적인 제약업체인 미 머크사에서도 식판을 들고 직원들 사이에 줄 서 있는 회장 모습을 방문객이 쉽게 볼 수 있다.

발전 송전분야의 세계적 초우량업체인 다국적 ABB사의 퍼시 바네빅 회장은 96년 방한할 때 무거운 서류가방과 옷가방을 직접 들고 비행기에서 내려 마중나온 한국의 협력업체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인텔 인사이드’란 광고카피로 유명해진 마이크로 프로세서업체 인텔. 앤디 글로브 회장의 집무실은 2.5평밖에 안된다. 글로브 회장이나 루 플렛 휼렛패커드 회장 등이 중형차를 직접 몰고 다니는 광경도 미국인들에겐 친숙하다.

그룹체제도 아닌 이들 기업의 지난해 매출은 대략 30조원 이상이고 경상이익은 5조원대. 한국 정상급 재벌들이 70조원대의 매출을 올리고도 사실상 적자장사를 한 것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사옥이나 최고경영자 집무실 크기와 기업 경쟁력과는 별 관계가 없었던 셈.

세계 유수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의전을 중시하지 않는 것은 한마디로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안되기 때문. 개인생활에선 ‘멋’과 ‘취향’을 따지지만 기업과 같은 조직생활에서는 의전을 챙기지 않는 것이 세계 표준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반면 한국재벌들은 의전분야에선 여전히 초우량급 행세를 한다. ‘생산성 향상’과 ‘조직슬림화’를 입버릇처럼 외치는 총수들도 자기 집무실 ‘의전거품’엔 관대하기만 하다. 경기도 과천의 K그룹 회장집무실. 20평 가까운 공간엔 안락소파와 고급 사무가구들이 들어찼다. 옆방엔 전용식당이 있고 전용 엘리베이터도 갖췄다.

7,8평 규모의 L그룹 회장실도 안락소파와 고급 사무가구가 즐비하다. 옆방에 접견실을 따로 뒀고 본사 사옥에는 30개 넘는 엘리베이터와 별도로 사장급들만 타는 VIP엘리베이터를 갖췄다.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외국기업 최고경영자 집무실과는 달리 D그룹 회장 집무실 입구에선 경비원이 외부인 출입을 막는다.

직원 1백명을 둔 서울의 중소 정보통신업체인 A사는 무려 6명의 임원이 있다. 회장과 사장 비서도 4명을 뒀다가 국제통화기금(IMF)한파가 밀려온 뒤에야 두명으로 줄였다. 하나은행 L차장은 “은행가에선 ‘그랜저 타는 중소기업인을 조심하라’는 경구가 나돌았다”고 털어놓는다. 형편이 어려운 중소기업일수록 ‘폼을 많이 잡기’ 때문.

K대 총장실은 계단식 집무실로 유명하다. 방문객이 총장을 제대로 쳐다보려면 3단의 계단을 올라서야 한다. 도서관 열람실이 비좁아 학생들이 길게 줄서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서울대 총장집무실은 IMF 구제금융 직후인 올해 초 확장공사를 해 더 넓어졌으며 본부보직교수들 집무실도 10여평. 각 부처 장관 및 지방자치단체장도 대부분 널찍한 집무실과 별도로 접견실을 두고 있다.

의전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주자학의 ‘명분론’과 관계가 깊다는 해석. 김병옥(金秉玉·교육철학)동국대 명예교수는 “만물(萬物)이 자기 위치를 지켜야한다는 주자사상은 ‘임금은 임금답게, 노비는 노비답게’ 살아갈 것을 요구했다”고 설명한다. 조선왕조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주자학을 도입해 우리사회에서 의전과 체면을 중시하는 관행이 굳어졌다는 것.

모 경제연구소 관계자는 “총수체면 때문에 벌어지는 기업간 그룹간 외형경쟁도 심심치않게 벌어진다”고 털어놓는다. 과거 대통령이 재벌총수들을 청와대로 불러 식사를 할 때 그룹 매출액 순으로 자리를 앉히는 등 덩치 불리기 경쟁을 부추긴 적도 있다. 최근엔 수출액을 놓고 경쟁이 벌어져 이익은 커녕 환차손을 입을 우려가 큰 금수출을 누가 많이 하느냐는 실적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의전거품 없는 실속경영으로 IMF 위기를 극복하는 곳도 적지 않다. ‘초관리혁명’으로 유명해진 삼원정공. 직원 1백50여명에 임원은 사장과 상무 둘뿐이다. 실질적으로 회사경영을 맡은 양용식(梁龍植)상무는 일반 직원과 함께 철제의자에 앉아 근무한다.

지난해 5천억원대의 매출에 1백60억원의 순익을 올린 남양유업도 직원이 2천명이지만 임원은 단 6명. 회장 집무실은 4평에 불과하고 사무실 집기도 대부분 내구연한을 넘겨 고색창연하다. 최근 공공부문 군살빼기를 선도하는 기획예산위원회는 고위급 관료들의 명패를 값싼 플라스틱으로 바꿔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