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낙연/마하티르의 경우

  • 입력 1998년 5월 20일 19시 36분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과 비교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남아에는 또다른 ‘문제 지도자’가 있다. 재임 18년째인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다.

마하티르 집권 초기만 해도 말레이시아는 주석과 고무나 수출하는 빈국이었다. 1천9백만 국민 가운데 5백만명은 기아선상에서 허덕였다. 그런 말레이시아를 그는 한국과 대만을 추격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특히 85년 이후 급격한 엔고 때문에 일본의 소비재 산업이 노동집약적 공정(工程)을 동남아로 대거 이전하면서 말레이시아도 그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거품도 낳았다. 게다가 동남아의 4분의 1도 안되는 저임금 노동력을 무한히갖춘중국이동남아 국가들의 소비재 시장을 잠식하자 사정은 크게 악화됐다. 동남아 경제위기는 거기서 시작됐다.

그럼에도 수하르토처럼 마하티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미 통화위기가 덮친 지난해 8월 두 사람은 양국 사이의 말라카 해협에 다리를 놓기로 합의했다. 공사비 8백억달러, 공사기간 10년의 초대형 프로젝트다. 경제위기의 한복판인데도 거품시대의 환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이들의 구상에 국제사회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합의는 한달만에 취소됐다.

그후 마하티르는 미국 퀀텀펀드 회장 소로스를 공격했다. 국제통화투기꾼들이 개도국 통화를 먹이로 삼고 있다며 소로스를 ‘동남아 통화위기의 원흉’이며 ‘수치를 모르는 부도덕한 자’라고 비난했다. 소로스는 “마하티르가 자신의 경제정책 실패를 은폐하기 위해 나를 속죄양으로 만들고 있다”고 반격하며 국제금융자본의 긍정적 역할을 강조했다.

논쟁은 소로스의 승리로 끝났다. 마하티르의 발언은 세계금융시장에 대한 무지를 드러냈을 뿐이라고 국제사회는 받아들였다. 마하티르의 그런 발언이 나올 때마다 말레이시아 통화 링기트는 폭락했다. 마침내 작년말 마하티르는 “내가 입을 열면 링기트가 무너지니까 침묵하겠다”는 말로 패배를 자인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얼마전 그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고개를 숙이느니 차라리 가난하게 살겠다”고 호언했다.

마하티르의 완고함에는 두가지 배경이 있다. 하나는 성공경험이다. 그의 방식이 그동안 성공했다고 보기 때문에 그것을 좀처럼 바꾸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공 이후의 개혁은 더욱 어려운 법이다. 또하나의 배경은 그의 민족주의적 태도가 국내에서는 인기를 얻는다는 점이다. 링기트 폭락으로 싱가포르에서 수많은 쇼핑객이 육교를 건너 말레이시아 남단 조호르바루에 쇄도, 상품을 싹쓸이하면 말레이시아 국민은 분노하지만 그럴수록 마하티르를 지지한다. 대중정치의 함정이다.

남의 일이라고 웃어서는 안된다. 우리 사회에도 마하티르를 닮은 세력이 있다. 성공체험에 취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관료와 부유층, 인기를 겨냥하거나 여론을 빙자해 개혁을 냉소하고 방해하는 정치집단과 일부 지도층, 선거를 의식해 부실기업정리 등 여러 경제정책에서 갈팡질팡하는 정부, 환율을 높이는 한이 있더라도 가두행동에 나서려 하는 과격세력, 외국자본을 맹목적으로 경계하는 상당수 국민은 말레이시아의 비극을 되새겨야 한다.

마하티르―소로스 논쟁은 이 시대의 ‘문명충돌’이다. 마하티르의 발상도, 말레이시아 국민의 반응도 하나의 문화일 수 있다. 동아시아는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았다. 모든 질서가 그렇듯이 국제금융시장의 메커니즘도 지고지선은 아니다. 선(善)과 악(惡)이 혼재한다. 그러나 지금은 거역하기 어려운 세계단일시장시대다. 90년대는 정부도 노조도 세계시장에 압도된 기간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 같다.

이낙연<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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