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천사’ 늘었다
고창 기부자 5년째 총 1125만원
논산 키다리 아저씨 20여년 총 12억
거창 7인의 천사는 대잇는 기부… 잇단 대형재난속 익명기부 늘어
나눔온도 79.7도… 100도 채워주세요
29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사랑의 온도탑 나눔온도가 79.7도를 가리키고 있다. 목표 모금액(4500억 원)의 1%인 45억 원이 모일 때마다 온도가 1도씩 올라간다. 모금은 내년 1월 31일까지 진행된다. 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성탄절을 이틀 앞둔 23일 부산 북구 덕천지구대 앞에는 현금 3만5000원과 김치 한 통이 담긴 상자가 조용히 놓였다. 편지에 이름 대신 자신을 장애가 있는 첫째를 포함해 세 아이를 둔 기초생활 수급 가정의 가장으로 소개한 그는 “올해는 폐지값이 떨어져 돈을 모으기 힘들었지만, 꼭 필요한 아이에게 좋아하는 선물 하나를 사 달라”고 당부했다. 그가 이름을 밝히지 않고 편지와 함께 나눔을 전한 건 벌써 8년째다.
● 폐지 줍는 가장부터 수억대 ‘키다리 아저씨’까지
23일 부산 북구 덕천지구대에 한 기초생활수급자가 두고 간 김치와 현금 3만5000원. 부산 북구 제공이처럼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데도 제 몫을 덜어내는 ‘얼굴 없는 천사’들은 전국 곳곳에서 마음을 나누고 있다. 광주 북구 매곡동에는 의수(義手)를 착용한 남성이 7년간 매년 오토바이 헬멧으로 얼굴을 가린 채 적십자사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는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써달라”며 꼬깃꼬깃한 1000원짜리와 동전 등을 건넸다.
전북 고창군 흥덕면에는 올해도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쪽지와 함께 두툼한 돈봉투가 도착했다. 익명의 기부자는 2021년부터 5년째 총 1125만 원을 내놓았다. 흥덕면 관계자는 “쪽지 내용이나 형태로 미뤄 기부자가 넉넉한 형편은 아닌 것 같지만, 그 마음은 지역 사회에 선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익명으로 시작된 기부가 수년간 이어지며 누적 금액이 수억 원에 이른 사례도 있다. 연말연시마다 억대 기부금을 보내는 충남 논산시 ‘키다리 아저씨’는 2001년부터 최근까지 총 12억2300만 원을 맡기면서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다. 그는 “아내의 고향인 논산 지역 어린이와 청소년이 보다 건강하게 성장하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고 한다.
이달 3일 경남 거창군 가조면 행정복지센터 앞에는 ‘7인의 천사’로 불리는 주민이 두고 간 쌀 포대가 쌓여 있다. 경남 거창군 제공익명 기부는 세대를 잇는 전통이 되기도 한다. 경남 거창군 가조면 행정복지센터에는 20년 넘게 쌀과 라면 등 수백만 원어치의 식품을 기부해 온 ‘7인의 천사’가 있다. 이들은 3일에도 쌀 20kg짜리 60포와 라면 100상자 등을 트럭에 싣고 왔다. 행정복지센터 관계자는 “아버지 세대에서 시작된 기부를 아들 세대가 이어오며 20년 넘게 지역의 전통처럼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27년째 쌀을 기부하는 제주 서귀포시 ‘노고록(‘넉넉하다’의 방언) 아저씨’도 항상 목도리와 마스크 등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나타난다. 그가 보낸 쌀을 지원받은 강모 할머니(83)는 “그 양반 덕에 명절이나 연말이면 외로운 마음보다 노고록한 마음이 앞선다”고 전했다.
● “불황·재난 뚫고 ‘내적 효능감’ 성숙한 문화로”
감사를 전하려는 사회복지기관과 정체를 숨기려는 기부자 사이에 조용한 ‘숨바꼭질’이 벌어지기도 한다.
9년째 경남 창원시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 입구에 국화꽃 한 송이와 함께 기부금을 놓고 사라지는 남성은 늘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으로 전화를 걸어 기부 사실을 알린다. 그렇게 맡긴 돈이 총 7억4600만 원에 이른다. 한 기부단체 직원은 “멀리 차를 세우고 걸어오는 기부자를 볼 때면 숨바꼭질하는 기분이 들지만, 그 수고로움 속에 담긴 진심을 알기에 굳이 뒤쫓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올해 유난히 익명 기부가 많았던 이유를 잇단 대형 재난에서 찾았다. 큰 피해를 불러온 재난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하고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조용히 확인하려는 마음이 기부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강철희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기부자 개인보다 수혜 대상이나 사회적 상황이 더 주목받기를 바라는 태도도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선행이 또 다른 선행을 낳는 선순환이라는 분석도 있다. 박철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타인의 선행을 확인한 뒤 이를 따르는 ‘친절 모방 효과’도 익명 기부의 전염성을 높이고 있다”고 했다. 서지민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고액후원팀장은 “젊은 세대 사이에선 예우 공간에 이름을 남기는 것마저 마다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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